▲전상진 / <세대게임> / 문학과지성사 / 2018.1.5
문학과지성사
"너희 젊음이 너희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영화 <은교>에서 노시인 이적요는 말한다. 이 대사는 자신의 늙음이 벌이고 타인의 젊음이 상인 현실에 대한 절규로 그려진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자. 작금은 한국사회에서 젊다는 것은 노력 아니 '노오력'을 요구하며 험난한 사회구조를 각자도생으로 돌파해낼 것을 요구하니 참으로 '벌'일 수도 있다. <세대게임>은 젊음이 젊은이를 위한 상이 아닌 사회 변화라고 말한다.
"노인은 더 이상 이타적이고 수동적이고 겸양하지 않는다. 이기적이며 능동적으로 탐욕을 부린다. 청년 역시 변했다. 그들은 무엇보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문제해결의 주체였던 청년은 문제로 전락했다." (52쪽)
경기는 어렵다지만 노인들을 위한 복지 정책은 매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강화된다. 보수정권이라던 박근혜 정권은 대선 시기부터 전면적인 노인 복지로 지지층을 확보하려고 했다.
노인계층은 장기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정책과 정치집단의 손을 들어주지 않는다. 자기 집단의 이익을 추구하고 단기적인 복지를 지향한다. 그래서 청년계층은 노인계층이 관철시키는 이기심의 발현을 보고 좌절하고 그들의 무책임함에 적대감을 느낀다.
여기서 하나 의문이 든다. 진정 노인이 욕망덩어리이며 세대 전쟁에서 악역인가? 그렇다 한들 노인의 복지와 미래세대의 복지가 양자택일의 대상인가?
한국의 노년은 실제로 복지가 필요하다(2017년 기준 OECD 회원국 중 66세 이상 노인인구의 상대적 빈곤율 1위를 기록하고 있다.) 누구도 생존과 기본적인 빈곤 탈출을 위한 노력을 과욕 혹은 사치라고 부르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 한국에서 노년층의 정책과 이익 집단화 현상을 청년세대의 고난과 엮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는 점을 필자도 말한다. 한국형 세대 전쟁은 조금 결이 다르다. 그래서 청년의 대척점에 '기성세대'라는, 딱 집어 어느 연령대라고 보기 모호한 세대를 놓는 것이다.
청년들의 일자리는 늘어나지 않고 계속해서 줄어만 간다. 진즉 노동 시장에 진입한 소위 '기성세대'는 지금의 세대가 느끼는 스펙과 학력의 인플레이션과 취업시장의 어려움을 겪은 바 없다. "나는 최루탄 맞으며 민주화 운동하고 잔디밭에서 기타 치면서 학사경고도 받았지만 대기업 입사했다"는 세대가 된다.
세대전쟁의 진실이때 사람들은 큰 치즈를 내놓지 않는 식당 주인이 아니라 손쉽게 치즈를 가졌던 사람을 공격한다. 즉 정치적 프레임으로 세대 전쟁이 발발하는 것이다. 필자는 이를 '비난의 세대 게임'이라 정의한다.
<장고: 분노의 추격자>에 등장하는 '만딩고 결투'와 유사하다. 만딩고 결투는 두 흑인 노예가 상대방을 죽여야만 생존할 수 있는 게임이다. 두 노예는 서로를 죽여야만 생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옆에서 생사의 기로에 자신을 던진 악덕 주인이 보인다. 그의 목숨을 끊으면 자유가 손에 들어오나 애초에 노예에게 주인에 대한 공격은 선택지에 없다.
'비난 게임'은 고도로 복잡한 정책의 부작용을 비난할 대상을 세워 공격하게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세월호 참사를 책임진 자 없었으며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에 책임진 정치 집단은 여태 없다. 소위 유체이탈 화법처럼 자신이나 자신이 소속된 집단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책임인 것처럼 공을 넘겼다.
박근혜 정부는 이 비난 게임을 이용했다. 연금이 동날 위기 상황은 기존 연금 시스템의 잘못으로, 일자리가 부족한 것은 '임금 피크제'를 필두로 한 유연한 노동 환경을 받아들이지 않는 기존 노동자들의 문제로 치환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