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웅 전 독립기념관 관장
최윤실
왜 3·1혁명이라고 불러야 하나. 지금부터 김삼웅 전 관장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자. 1919년 3~4월 당시 조선의 인구가 1700만 명, 전국에 걸쳐 1542회 만세 시위가 펼쳐졌고 전 국민의 1/10이 참여한 3·1운동은 비폭력, 대중화, 일원화라는 원칙을 가지고 비폭력 만세 시위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 군경 및 헌병에 의해서 사망 7500명, 부상자가 1만 6천 명, 피검자가 5만 3천 명이 발생하였다. 이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을 역임한 백암 박은식의 독립운동지혈사에 실린 내용이다. 총독부 기관지 내일신보 및 일본 신문들은 당시의 만세 시위를 '3·1폭동', '조선 난동', '손 씨(손병희 선생) 주도하의 반란'으로 폄훼하였지만, 중국의 신문 잡지는 '조선 혁명', '기미 혁명', '3·1 대혁명'이라고 평가했으며, 우리 역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후에는 '3·1혁명', '대혁명'으로 표기하였다.
유진호 박사가 대한민국 헌법을 기초할 때는 '기미 3·1혁명'이었다. 하지만 친일에 부역했던 한민당 의원들이 새 정부가 수립되는데 혁명이라는 용어는 과격하다며 이승만 국회의장에게 여러 번 진언을 했다. 40년 망명생활로 국내에 지지기반에 없었던 이승만은 제헌국회를 석권한 한민당 의원들의 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 때부터 제헌헌법 전문에 3·1운동으로 격하된 것이다. 그렇지만 세계 혁명사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주 독립을 위해서 인구의 10퍼센트 이상이 혁명 대열에 참여하는 것은 3·1혁명 이래 없었다.
김삼웅 전 관장은 '3·1혁명'이라는 정명을 되찾아야 하는 이유로 여러 가지를 열거했다.
유구한 역사 동안 군주 체제였지만 3·1혁명을 계기로 민주공화정으로 바뀌었고, 일본으로부터 자주 독립을 외쳤으며 반만년 동안 남성 위주의 지배체제 하에서 신음하던 여성들이 유사 이래 처음으로 역사 현장에 등장하였다. 조선시대에 가장 낮은 계급이었던 기생과 보부상, 백정들까지 뛰어들어 만세를 불렀으며 불교, 천교도, 기독교 등 종파를 뛰어넘는 범민족적인 시위였다. 신분, 계층, 성별이 없이 국민이 하나가 된 위대한 혁명이었다. 또한 중국의 '5·4운동', 인도의 자치 운동, 이집트 및 아랍 반영(反英)시위 등 해외 피식민지 국가들에게 자주독립의 기폭제를 마련해 준 사건이었다.
방송을 들으면 가슴이 저절로 뜨거워지고 3·1혁명이라 불러야 할 이유를 알게 된다. 김삼웅 전 관장은 3·1혁명이라고 명기되기 위해서 후학들이 어떻게 해야할지 구체적인 방법도 제시해줬다. 아울러 그동안 조명되지 못했던 여성 독립 운동가들의 활약상도 알 수 있었다. 김 전 관장은 남성들의 종속 변수가 아니라 주체로서 독립운동을 했던 여성들을 찾아 실체를 복원하고 역사의 제 위치에 모시는 것이 후손들의 도리가 아니겠냐고 반문했다. 독립 전선, 항일 투쟁에 참여하여 서훈을 받은 여성은 단 1%다. 비밀리에 한 활동이라 여성독립운동가들의 행적을 찾기 어렵겠지만 더 많은 여성 독립 운동가들을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