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화순군 동복면 연둔리에 있는 숲정이길.
마동욱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늙은 느티나무 그늘 아래 한 중년 여성이 앉아 있었다. 기운이 빠져 등은 약간 구부정하게 굽었고, 초점 잃은 동자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앞에서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무슨 사연이 있어서 이 길을 홀로 걷는 것일까. 여기서 누군가를 만나기로 한 것일까. 그녀가 한참을 느티나무 아래 앉아 있었지만 찾아오는 이는 없었다. 오지 않을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냥 그렇게 매겁시('아무 뜻이나 목적 없이'의 전라도말) 기다리기로 한 것일까.
걸음을 멈추고 한동안 그녀의 등을 바라보았다. 나무들과 함께 그녀의 쓸쓸한 등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었다. 머지않은 날 나의 이야기거나 어릴 적 엄마가 낮잠 결에 들려주어 흘려버린 이야기. 연둔리 숲정이길에서 소녀가 된 엄마가 들려주는 자장가를 들었다.
눈물이 스르르 흘러내렸다. 나무들은 새록새록 잠들기 시작했다. 강물은 잠시 멈추고 그 여자를 안아주었다. 여자가 보에 안긴 아기처럼 순하게 고개를 떨구었다. 참매미 한 마리 울지 않는 지난 늦봄 연둔리 숲정이의 오후를 잊지 못한다.
'숲정이'는 마을 근처의 숲을 가리키는 우리말이다. 연둔리 숲정이는 약 1600년 전에 물을 다스리기 위해 둔동보를 만들었는데 혹시 보가 감당하지 못한 물로 마을이 피해를 입을까 염려해 만든 인공림(人工林)이다. 물이 범람해 마을을 덮치는 것을 막기 위한 일종의 방수림(防水林)인 것이다. 섬마을이나 바닷가마을에 거친 바람을 막아 마을을 보호하는 방품림(防風林)이 있듯 육지 강변마을엔 방수림이 있다.
1km 남짓 이어진 연둔리 숲정이엔 227그루의 나무가 어울려 살고 있다. 주로 느티나무, 서어나무, 검팽나무, 왕버들나무다. 나이 많은 나무는 수령 200년을 웃돌고, 젊은 나무는 50년 안팎의 나이테를 뽐내고 있다. 주민들은 숲정이에 어울리는 종을 골라 요즘도 때때로 나무를 심고 있다. 그렇게 나무의 또 한 세대가 이어진다. 사람의 사연이 이전 세대에서 이후 세대로 이어지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