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데나'라고 해서 정말 '아무데나'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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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닙니다. 엄마랑 살던 시절을 떠올려보세요, 어머니가 제 방 문을 엽니다. "방을 이렇게 돼지우리같이 해 놓고 어떻게 사냐!" 잉? 저는 아무 문제없이 잘 살고 있습니다만? 귀신 나오겠다, 잠이 오냐, 사람이 어느 정도 정리를 해 놓고 살아야지 등등... 독립을 하고 나서도, 엄마가 내 집에 온다고 하면 택시 타고 미친듯이 퇴근해서 급하게 치워댔던 이유가 다 뭡니까? 엄마는 이러고 사는 꼴을 못 보시기 때문이죠. 안 그래요?
엄마의 '아무데서'는, 어느 정도 깔끔한 룸 컨디션을 유지하는 숙소인 상태에서 다른 일행과는 확실히 독립된 공간이 보장되는 곳을 뜻합니다. 호스텔... 개별방이면 모르지만 당연히 안 될 확률이 높습니다(물론 그런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흔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 부모님이 20인실에 주무시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는 것이 저희 부모님이 유난스러운 성격이라거나 쿨하지 못함을 의미하는 건 아닙니다. 각자 예산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쓸 거 쓰고 줄일 거 줄이는 게 자유여행의 기본이고, 어디서 줄일 것인지는 각자 살아온 삶을 토대로 봤을 때 언제 심리적인 압박을 덜 느끼는지가 기준이 될 뿐이니까요).
그런데 저희 '고객님'들은 어디에 익숙하다? 패키지여행에 익숙하지요. 패키지여행에는 뭐가 있다? '버스'가 있습니다. 그런데 자유여행 하는 우리한테는 그런 거 없죠. 그래서 패키지여행처럼 싸다고 숙소를 외곽에 잡았다가는 난리 납니다. 시내 중심으로 잡자니 또 스페인 호텔 가격이 어마어마해서 걱정되기 시작합니다. 셋이 자도 마찬가지고요.
일정이 2주를 넘는 저희 같은 경우는 더욱 그래요. 예산 자체도 문제지만 버스 타고 갈 거리의 적당한 가격의 호텔 다니시던 분들이 시내 한복판 호텔 가격 보는 순간 부모님 마음까지 불편해질 가능성이 높지요. 여기까지가 최적화된 숙소 결정을 위해 부모님을 객관화하는 과정인데, 여기서 이제 자기 객관화의 시간이 또 필요합니다.
[숙소] ② 나는 엄마 아빠와 한 방에서 잘 수 있는가?이제 나를 돌아볼 차례입니다. 아니오. 솔직히 엄마·아빠는 오히려 별 신경 안 쓰실 수도 있습니다. 이런 면에선 엄마 아빠가 훨씬 쿨합니다. "엑스트라 베드 놓고 셋이 자면 되지 뭐~ 어릴 때는 뭐 안 그랬나~" 이번에는 내가 유난입니다. 엄마 아빠랑 잠 못 자요. 엄마 아빠가 피곤하면 코 고실 수도 있고, 심지어 피곤하면 저도 골 수 있지요.
문제는 엄마·아빠는 대체로 머리만 대면 잘 주무십니다. 그러면 세 사람이 동시에 여행하다 지쳐서 코를 골며 잘 경우가 온다는 건데, 대참사는 마지막에 자는 자에게만 옵니다. 외국까지 가서 새벽에 자면 큰일나요. 저는 새벽에 자서 오후 2시쯤 싸돌아다녀도 되는데, 제가 아까 언급했듯이 부모님은 그런 여행 태어나서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아무리 관대하게 마음먹어도 12시 전에는 숙소를 나가줘야 서로의 정신건강에 좋아요.
그리고 현실적으로 각종 예약, 맛집, 관광지 루트 등을 담당할 나는 숙소에 돌아오면 재정비가 필요합니다. 내일 뭐 할지 살펴보고, 체크하고, 변수가 생기면 변경예약도 알아보고. 그럴 때 부모님이 숙소 와서도 그러고 있으면 마음 불편해서 "엄마는 아무데나 상관없으니 그만하고 자라" 하실 확률이 높아요(진심으로). 그리고 말씀드렸듯이 '아무데나'는 나와 부모님의 기준이 다르므로, 정말로 대책 없이 살아온 내 입장에서는 부모님 놀라시지 않게 뭐라도 알아보고 자 줘야 서로 마음이 편합니다. 독립된 공간은 그래서 중요해요.
이 모든 걸 충족시키는 것은, 에어비앤비에서 방 2개 이상의 집을 통으로 빌리는 것입니다.
스페인이 호텔이 많긴 하지만 당연히 가격이 꽤 나가는데, 이게 일반인의 집이 되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서울시내 한복판에 있는 호텔은 비싸서 저도 1년에 한 번도 가 볼 일이 없습니다.
(서울인 독자 여러분) 우리 다 서울 시내에 살잖아요. 여기서 가격 경쟁력이 발생합니다. 호텔에서 1인이 1박 할 가격으로 완전 한복판에 있는 숙소를 싸게 예약할 수 있습니다. 저희는 방 2개, 주방이 있고(이거 굉장히 유용합니다) 남들과 쉐어하지 않는 집을 기준으로 예약했습니다.
3명이서 스페인 주요 도시 한복판 숙소를 12만 원에서 15만 원 사이에 예약할 수 있었어요. 어느 정도 한복판이냐면, 마드리드는 마요르 광장 / 바르셀로나는 람블라스 거리 / 론다는 누에보 다리 전망... 이걸 서울 기준으로 하면 이태원 해밀톤호텔 / 홍대 상상마당 / 강남역 지오다노 정도 위치예요. 이 정도 수준의 한복판이었어요.
주방이 있기 때문에 하루 일정이 끝나고 라면 한 판 먹고 싶어하시면 함께 먹기도 좋았고, 마트에서 스페인 와인 사다가 온갖 현지 과일 채소와 함께 한잔 하면서 마무리하는 재미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건 살짝 뭉클하면서도 짠한 이야기인데, 전업주부 어머니들은 뭔가 싸게 해 먹는 데에서 굉장히 희열을 느끼실 때가 있습니다. 밖에서 뭘 먹을 때 "이거 엄마가 할 수 있을 것 같아" 하시고는 물 사러 간 마트에서 이것저것 사오시곤, 다음날 짠 내놓으신 적이 있어요(스페인 고추 볶음이요). "맛 똑같지?!" 하시면서요. (진짜 똑같았어요!)
과일도 막 사서 풍족하게 깎아놓고 "한국 가면 이게 얼마야~" 하면서 기뻐하시고요. 거의 대부분 외식을 했기 때문에, 아침에 간단하게라도 뭔가 새로운 걸 해먹어보는 걸 재미있어하셨던 것 같아요. 물론 가이드인 저는 맛집 기껏 찾아놨는데 자꾸 위장 케파(수용력)를 갉아먹는다고 싫어했지만, 마술처럼 짠 내놓고는 설레는 표정으로 가족들 먹는 모습을 지켜보던 엄마는 참 대단하고 귀여운 것 같아요. 처음에는 '제발 여기까지 와서 하지 마' 했는데, 나중에는 '엄마 마음 편하면 하시게 두지 뭐' 하고 뒀습니다. 엄마 새삼 고마워요!
그리고 에어비앤비 호스트들이 언제나 반갑게 맞아주는데, 부모님은 그런 게 참 재미있으셨던 것 같아요. 모르는 외국인이 "헤이~" 하면서 반갑게 인사하고 "웰컴!" 하면서 와인도 한 병 주고요(스페인은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여행 중에 가슴 깊이 기억하는 엄마의 말 중 하나는, 세비야 숙소에서 문득 "민지야, 엄마는 외국 할머니 집 같은 곳에서 차 마셔보는 게 꿈이었어. 그런데 엄마가 사는 동안 그런 게 이뤄질 줄 몰랐어"였어요. 순간 너무 슬프고 기쁘고 그랬던 것 같아요. 너무 예상치 못한 순간이어서 "그래?" 같은 소리밖에 못 했어요. 여러모로 에어비앤비는 좋은 선택이 됐어요(나중에 과정은 차차 나오겠지만 여튼 여담 하날 풀자면 귀국 후 엄마 아빠는 에어비앤비 호스트를 하고 계세요).
그리고, 여러분이 숙소 구하실 때와 다른 포인트가 하나 더 있다면 이런 게 있어요.
[숙소] ③ 엄마 아빠는 나이가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