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치기 전, 양호남씨의 모습.
양호남씨 가족
누나는 10살 어린 동생 양호남씨의 사진을 보내왔다. 너무나도 앳된 청년의 얼굴이었다. 그의 나이 스물여섯.
"친구들한테 동생 자랑을 많이 했었어요. 아이돌 같다고..."또 다른 사진도 보내왔다. 사진 속 2년 전 동생은 사촌의 결혼식장에서 엄지를 내밀고 있다. 동생은 당시 6년을 사귄 여자 친구와 이듬해인 2016년에 결혼하기로 약속했었다.
"항상 자기가 최고라며 사진 찍을 때 '엄지 척'을 하곤 했었어요. 그런 사진들을 보면, 가슴이 찌릿찌릿하고 눈물이 나요."지금 동생은 그때의 동생이 아니다.
그는 앞을 볼 수 없다. 시력만 잃었다면 차라리 다행이었을 것이다. 호남씨는 뇌를 크게 다쳐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다. 남들처럼 음식물을 꿀꺽 삼킬 수 없다.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삼켜야 한다. 그나마 많이 나아진 것이다. 얼마 전까지 물도 마시지 못했다. 물이 폐로 들어갔다.
동생은 두세 달에 한 번씩은 꼭 눈이 뒤집힌 채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며 쓰러진다. 밥상 앞에서, 공원에서 쓰러지는 일은 일상이 됐다. 정신적 충격은 동생의 성격을 크게 바꿔놓았다. 엄마 아빠와 간병인들에게 신경질을 내며 막말을 쏟아낸다. 가족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눈물로 세월을 보내는 것이다.
"시간을 돌려놓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때 친구들이 있는 서울로 가겠다는 걸 막았다면..."
누나는 동생의 비극을 두고 스스로를 탓했다. 하지만 그녀 탓이 결코 아니다. 가해자는 따로 있다. 바로 호남씨를 죽음의 공장으로 보내고 수수료를 챙겼던 파견업체와 이윤에 눈이 멀어 호남씨의 삶을 앗아간 사용업체다.
중간착취를 허용하고 사람을 사고파는 불법 파견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하고, 가해자들에게 제대로 된 죗값을 묻지 못하는 대한민국 역시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기적은 계속되지 않았다호남씨의 누나를 만나러 가는 길은 참 멀었다.
두 달 전부터 만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통화연결음만 길게 이어졌다. 문자메시지를 보냈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 어렵게 연락이 닿았다. 동생의 억울함을 세상에 잘 전달하겠다고 설득했다. 다행히 마음의 문이 조금씩 열렸다.
지난 10일 오전 서울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도시에서 그녀를 만났다. 전날 밤샘 근무를 한 그녀는 카페에서 기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2015년 12월 30일을 결코 잊을 수 없다.
그날 일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통근버스를 탔다. 오후 7시 30분쯤 전화가 왔다. 동생의 친구였다. 다급한 목소리였다.
"누님, 호남이가 쓰러졌는데, 의식이 없어요."몸이 떨려 진정할 수 없었다. 동생이 친구들이 있는 서울에 올라간 건 불과 2주 전이었다. 8일 전에는 부천에 있는 스마트폰 부품 공장에 들어간다고 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날 밤 렌터카를 빌려, 동생이 실려 간 대학병원으로 향했다. 호남씨는 의식 없이 중환자실에 누워있었다. 의사는 말했다.
"평생 식물인간으로 살 수 있어요."엄마와 아빠가 뒤늦게 병원에 왔다. 아들의 모습에 엄마는 눈물을 쏟더니 곧 까무러쳤다.
여자 친구는 호남씨 곁에 머물렀다. 그에게 KCM 노래를 들려줬다. 호남씨가 좋아하던 가수였다. 며칠이 지나자 호남씨는 눈을 떴다.
"사지가 마비될 수 있어요."의사가 말했다. 다시 기적이 찾아왔다. 호남씨는 계속 경련이 일어나는 가운데도 조금씩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신적 충격 탓에 몇 달 동안 말도 못한 호남씨는 조금씩 입을 열었다. 기저귀도 몇 달 만에 뗐다.
"앞을 볼 수 없을 거예요."의사가 말했다. 그는 호남씨가 삼성전자 스마트폰 부품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면서, 메틸알코올(메탄올)에 무방비로 노출됐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고농도의 메탄올은 호남씨의 중추신경계와 시신경을 파괴했다.
기적은 거기까지였다. 죽은 시신경은 되살아나지 않았고, 시력은 돌아오지 않았다. 쓰러진 지 1년 6개월이 지났다. 호남씨는 언제 재활병원에서 퇴원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