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교복값까지 따로 미리 빼놓기에는 삶이 빡빡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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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앞에 빈 소주병이 나란히 줄 세워져 있다. 선뜻 들어가지 못하고 주저하니 영임(가명)이가 할머니가 해놓으신 거라며 발로 병을 무심히 차 길을 터준다. 문을 여니 한겨울 추운 날씨를 닮아 앙상하게 구부러진 할머니 한 분이 허공에 손을 벌벌 떨며 상자를 발로 밟아 펼치고 계셨다. 누가 봐도 편견 없이 '가난하구나'라고 판단되는 곳. 집안 곳곳은 할머니의 생활이 그대로 드러났다. 낡았지만 깔끔했고, 부서져 있지만 쓸만했다.
누군가에겐 일상이고 누군가에겐 남의 이야기가 할머니 입에서 흘러나온다. 김영임(가명, 만 12세)은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할머니와 살았다. 막노동으로 생계를 책임지는 아버지가 일하다 목을 다쳐 오랜 기간 병상에 있었다. 일을 못 해 생계가 어렵자 어머니는 자식 둘을 두고 집을 나갔고, 재혼하며 연락이 끊겼다.
작년에는 할아버지가 암 진단을 받고 생활이 더 어려워져 병원비가 나갔다. "이것저것 급한 것들과 생활비를 쓰다 보니, 일평생 남한테 빚진 적 없이 반듯하게 살아왔는데 말년에 이렇게 빚도 지고 남한테 신세 지게 되었다"며 할머니는 연신 바짝 마른 손으로 세수하듯 얼굴을 쓸어내리신다.
"다른 집 아(애)들은 30만 원도 넘는 교복을 돌려입는다고 여벌 옷도 사고는 하든디, 우리 아는 한 개도 내가 못사중게로... 아 앞에서 들 낯짝도 없어부러... 넘(남)의 세상이여.. 울 집 빼고는 다 워데서 그렇게 돈들을 펑펑 써댄댜."보통 사람들이라고 할머니의 생각처럼 교복을 펑펑 사지는 않는다. 서민들도 한꺼번에 사려면 부담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 목돈이 없을 경우 가계에 부담을 더는 방법으로 할부를 택하기도 한다. 하지만 극빈층 일부는 신용불량자이거나 카드 발급이 가능한 직업군이 아닌 탓에, 현금으로만 생활하게 된다. 후자의 경우인 할머니는 당장 그 큰돈을 어떻게 모으나 한숨을 쉬셨다.
몇 달 째 연체된 카드 금액을 넌지시 여쭈니 130만 원가량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지난해 한국신용정보원의 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금융채무불이행자(신용불량자)는 102만 명, 총 연체액은 이미 130조 원에 달한다. 그중 53%는 1000만 원 이하의 소액 연체자다. 할머니가 교복값까지 따로 미리 빼놓기에는 삶이 빡빡했으리라.
불평등한 평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