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미치게 하는 질문들 "왜 이딴 걸 물어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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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명절에 고향으로 출발하기 전부터 몸서리치거나 혹은 이미 해외도주에 성공한 이들이 제일 혐오한 건 무엇이었을까? 명절 안부 인사 프레임 안에서 우리는 소수자다. 연애 여부를 떠나 결혼할 생각 없고, 애 낳을 생각 안 해봤고, 엄마 친구 아무개처럼 모아놓은 돈으로 어디 경기도 외곽에 작은 오피스텔 하나 장만해두지 못한 우리는 질문자인 꼰대들 앞에서 소수자다.
우리를 소수자로 만드는 건 우리가 이상해서가 아니라 저런 질문들 때문이다. 질문하는 사람들은 계속 우리에게 이런 것들을 상기시킨다. '너, 몰랐어? 너 이상해. 너 되게 잘못 살고 있어. 너 불행한데, 몰랐니? 아니 그러니까, 지금 그게 불행한 거라니까. 얘가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들어, 남들은 안 그런다니까. 소수자야 너!' 하는.
명절 안부인사 프레임에서 벗어나기란 참으로 어렵다. '너 살 너무 쪘다' 소리를 듣다가 확 빼고 나타나니 '어휴 너무 뺐다. 좀 찌워' 소리를 들으며 통감했다. 만약 당신이 우리 친척이 원하는 표준체중에 들어가더라도, 어떤 면에서 소수자성을 지니게 될 것이다.
누가 중국집에서 냉면을 시켜먹어요? 때 되면 자야지 12시 지나도 안 자고 왜 그러고 살아? 남들 소주 먹는데 굳이 맥주가 먹고 싶냐? 주말에 왜 집에만 있어? 사람이 좀 나가고 그래야지? 포켓몬고 왜 안 해? 야 너만 빼고 다 한다!
이 중 어느 하나에라도 소소한 '빡침'이 올라온다면 당신은 사회가 정해놓은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난 사람이다. 여기에도 안 속한다고? 문제는 이런 사람 미치게 만드는 질문은 무한대라는 점이다. 반면에 우리가 그 모든 소수를 피해갈 확률은 0에 수렴한다.
'이래야 정상이야'라는 기준을 주장하는 것, 같은 테이블에 있는 이들의 동의를 얻어 대세 안에 있음을 확인하는 것, 혹시 안 그런 사람이 있는지, 누구인지 질문하는 것. 그 모든 과정은 어떤 식으로든 소수자인 우리를 스스로 미치게 만들 뿐이다.
'오늘 춥던데 그래도 이거 입는 건 오버겠지?'라며 피곤하게 남 눈치 봤던 수많은 아침들, 메뉴 하나 고를 때도 내가 당장 먹고 싶은 것보다는 무엇이 이 시점에서 적절한 초이스인가 고민하다가 머리가 터질 것 같았던 식사 자리. 그 모든 것들은 사실 우리가 그런 식으로 직접 구축한 세상이다. 소재와 배경만 끊임없이 바뀐 것일 뿐이다.
이런 세상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경우가 "너 게이야? 왜 말 못해 이 게이 새끼야?"와 같은 질문을 하는 것이겠지만, 무심결에 여성에게 "남자친구 있어?"라고 질문을 던지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나는 눈 앞에 있는 네가 여성이므로 남자를 좋아할 거라고 인식하는 보통의 사람이다, 네가 남자가 아닌 여자를 사귀는 것은 예외적인 일일 것이고 여긴 내가 그냥 '남자친구 있어?'라고 물어도 되는 그런 세상이란다' 하고 확인시키는 것 역시 그런 세상을 만드는 데에 소소하게 기여하니까.
소수자에게 "그렇게 당당하면 커밍아웃해"라고 말하는 것이 더더욱 의미없다는 건 덧붙일 필요도 없다. 피부가 까무잡잡한 편인 내가 수분크림을 사러 화장품 가게에 가면 "고객님, 미백 기능 있는 걸로 추천해드릴게요"라는 말을 듣는다. 그럴 때 나는 "저는 제 피부에 만족하고 휴가 때마다 태닝하고 오는데요"하고 점원을 무안주기보다는 조용히 매장을 나오는 일로 상황을 타개하는 편이다. 당장 문제제기하고, 나서지 않는다고 해서 내 피부에 때문에 손가락질당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이상한 사람은 없다, 무례한 질문이 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