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메산골 사람들, 2003
조문호
그가 인물 사진(portrait)을 주로 찍는 것은 이렇듯 사진 찍는 일을 실존적으로 행위 하는 결과다. 그의 <두메산골 사람들>은 이러한 사진의 의미를 가장 잘 드러내주는 작품이다.
애초에 그는 환경 문제를 다루기 위해 강원도 동강에를 갔다. 1990년대 중반의 일이다. 처음 계획은 동강 댐 건설에 반대하면서 그 일을 다큐멘터리로 작업하기 위한 것이었고, 그 일을 위해 정선에 머물렀으나, 정작 그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그곳 두메산골에 사는 사람들이었다.
이후 그는 그곳에 사는 두메산골 사람들을 찍기 위해 정선에서 6년간 눌러앉아 그곳 사람들을 찍었다. 사회 문제로 출발하였으나 결국 돌아온 것은 사람에게로 이었으니, '사람'은 사진가 조문호에게 지남철에 끌리는 쇳가루다.
그가 사람 자체에 매료당한다는 것은 그의 사진 스타일을 봐도 잘 알 수 있다. 그는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이 널리 하는 내러티브 만들기 같은 것을 그리 중요하게 신경 쓰지 않는다. 원경도 잡고, 중경도 잡고 근경도 잡으면서 중간 중간에 이야기를 연결시켜주는 오브제 같은 것도 집어넣는 것이 대개들 하는 방식인데, 그는 그런 방식에 별로 집중하지 않는다.
오로지 꽂히는 것은 인물뿐이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극(劇)이 아니고 사실(事實)이기 때문이다. 농부가 도리깨질을 하고 있으면 그냥 그 도리깨질 하는 그 자리를 찍어 보여주면 될 일이다. 화전민이 밭을 태우면 그냥 그 불 탄 밭에서 그를 찍을 뿐이다. 방도 부엌도 마루도 모두 있는 그대로다.
그곳에서 일하며 사는 사람들 모습만 보여주면 되지, 굳이 사진가가 어떤 이야기를 일부러 만들 필요가 없다. 더 보태거나 뺄 필요도 없고, 순서를 짤 필요도 없다. 기록자로서 그들의 있는 그대로의 삶을 사실적으로 기록하고자 해서이기도 하고, 사진가의 존재보다는 그 자리에 있는 사람으로서의 그들 개개를 존중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결국 그의 사진 찍는 행위는 예술이나 진보운동과 같은 어떤 본질을 향하는 것이 아니다. 사진가 조문호가 하는 사람에 대한 존중 차원에서의 실존적 행위는 상황에 따라 자유롭게 변화하는 행위다.
행위자가 능동적이고 주체적이다. 그런데 사진가 조문호의 그러한 실존 행위는 그를 소유의 존재로서 멀리 떨어지게 했다. 사람과의 소통과 그 안에서의 능동적 주체성을 찾으면서 사진을 하다 보니 먹고 사는 문제에 소홀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그래서 일곱 살 박이 아들의 눈물을 가슴에 묻으면서 가난에 몸서리치면서 아내를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다. 이 대목에서 그가 남긴 말 한 마디가 가슴을 후빈다.
'사람을 생각한다면서 가족을 등한시 하는 것에 대한 고뇌가 평생 무겁습니다.'2. 사람, 세계의 중심사람을 그렇게나 좋아하는 것이, 사진가 조문호는 영락없는 예술가다. 그 누구한테도 규제받지 않는, 부조리한 세계에 대해서는 거리낌 없는 쓴 소리를 마구 던지는, 돈은 없지만 '가오'는 있는, 그런 가난한 예술가 말이다.
조문호는 비록 한 평생 물질적으로는 가난하고 힘들게 살면서 허기진 뭔가를 그 인사동 사람들을 통해 메웠다. 그 인사동이 점차 사라지기 시작할 때, 그가 카메라를 들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이 한둘씩 세상을 떠나 그 때 그 사람들이 없어져 갈 때 그들과 나눴던 사람 냄새를 보존하기 위해 그들을 사진으로 박제해두고 싶었다.
겉모습뿐만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 지천으로 깔렸던 그 정(情)과 우애를 담아놓고 싶었다. 사진가는 사진을 찍어 기억하게 하고, 가난한 예술인들은 사진에 남아 서로를 기억하도록 하고, 그래서 모두 '소풍' 마치고 하늘로 돌아가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나누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