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기씨 때문에 부끄러워졌습니다

'나도 저기에 있어야 하는데'... 이 말만 속으로 되뇌이던 나의 비겁함

등록 2015.11.24 09:14수정 2015.11.24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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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강원도에서 태어나고 그곳에서만 자라서 고3 때 대학을 가기 위해 밤기차를 타고 상경한 것이 말로만 듣던 서울을 난생 처음으로 발견한 날이었다. 지금 시대로 치면 미국유학을 위하여 워싱턴이나 뉴욕에 간 것이나 다름없는 내 인생에서 큰 사건이었다.

내가 서울을 발견했을 때 나에게 관심을 끄는 것은 높은 빌딩이나 많은 자동차보다 시대가 돌아가는 모습이었다. 시골에 있었던 어린 시절에는 대통령이 누가되던 그 대통령이 무슨 짓을 하든 하등 관계가 없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한글을 알기 시작했을 때 담벼락에 붙어있던 리승만, 리기봉의 포스터는 오바마나 푸틴 같은 아주 먼 나라의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서울에 와서 대학에 들어가니 내 또래의 학생들이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고 대자보를 붙이고 정부의 불순한 의도를 알리는 집회가 자주 열렸다. 정치는 아주 먼 나라의 일이었던 나에게 신기하게 느껴진 것은 '저 친구들은 어떻게 정부의 의도를 알지?' 하는 것이었다. 정치인들이 하는 말이나 정부에서 시행하는 일들을 다 알고 있고, 그들의 숨은 의도까지 파악하고 있었으니, 필시 저 친구들은 부모님이 정치하는 사람일거란 심증을 가졌다.

학생들이 왜 데모를 하는지 이해도 못 한 채 1972년에 3학년이 되어, 9월 한 달은 꼬박 국군의 날 행사 준비를 위하여 여의도 광장에서 열병식 연습에 학군단으로 참석해야 했다. 10월 초 학교로 돌아와 딱 일주일 공부를 하고 나니 축제를 한다고 수업은 하는 둥 마는 둥 하던 어느 날, 전국의 대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졌다. 선불로 낸 하숙비를 일부 돌려받고 강원도로 돌아가 있었더니 나중에 이름 붙여지기를 그것이 유신혁명이란다.

그 후에 벌어진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나는 이해가 부족했던 지난 일의 실상을 깨우치게 되었다. 이게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소극적으로나마 저항을 꿈꾸게 되었다. 투표에서 아버지가 미리 내린 지침의 반대쪽에 찍거나, 소대장으로 전방근무할 때 유신체제 재신임투표에서, 중대장 책상앞에서 전 중대원이 공개투표를 실시하는 선거에 참관하라는 명령에 항거하여 참관거부를 하거나. 그 일로 인하여 여단장으로부터 "귀관을 예의 주시 하겠다"는 관심어린 편지를 받은 것이 다였다.

지난 14일 시위에서 물대포를 맞아 사경을 헤매고 있는 백남기씨의 이력을 보니 내가 남의 일로 여기고 '쟤들이 왜 저러지..'하면서 이해하지 못했던 그 시기에 대자보를 붙이고, 집회를 주동하던 바로 그 학생중의 한 명 이었다. 이제 보니 그는 정치인을 아버지로 둔 사람도 아니고 나처럼 시골에서 올라 온 촌뜨기의 한사람이었다.

그는 나보다 2년이나 먼저 입학한 선배였지만, 내가 시위를 구경하고 있을 때 이미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첫번째 퇴학 처분을 받았고 10월 유신이라는 상황에 이게 뭔가하고 내가 어리둥절 해 하고 있을 때, 유신철폐 시위를 하다가 지명수배를 받고 있었고, 내가 여단장으로 부터 관심어린 편지를 받고 있을 때 두번째 퇴학처분을 받았다.


어쩠거나, 나는 제대를 하고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들을 둘씩이나 낳고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동안, 독재에 저항하는 사람들은 지명수배를 받고, 숨어 다니고, 잡혀서 고문을 당하고, 감옥에 가고, 일부는 죽임을 당하면서 민주화를 위하여 험난한 인생을 살고 있었다. 백남기씨가 퇴학과 복교를 거듭하면서 독재자와 싸우고 있는 동안 유신의 핵은 쓰러졌고, 그는 80년 서울의 봄에 다시 복교되어 늙은 학생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새로 등장한 또 다른 독재자는 백남기를 평범한 학생으로 머물게 두지 않았고, 계엄군에 의해 체포되어 또 다시 옥살이를 했다.

'민주화'라는 말을 할 때마다, 들을 때마다, 나는 큰 빚을 지고 있다는 자책에 빠진다. 그들이 최루탄을 맞으며 싸우고, 닭장차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고 옥살이를 할 때, 남의 일인듯, 먼 나라의 일인듯, 때로는 일부 불순분자로 매도하고 있었던 나는 나에게 공짜로 다가 온 민주화를 말할 자격이 있는가.


그들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던 촌뜨기 시절에는 그랬다 치더라도, 정의와 불의를 구분할줄 알았던 80년대에도 좋은 직장에 안주하여 평온한 생활에 만족하며, 넥타이를 매고 최루탄을 맞으며 아스팔트 위를 어깨동무하며 행진하는 그들을 보도블록 위에 선채로 바라보며 "나도 저기에 서야 하는데... 나도 저기에 있어야 하는데..." 그 말만 속으로 되뇌였다. 끝내 아스팔트 위에 내려서지 못했던 나의 비겁함이 부끄럽다.   

그리고 어제는 군사독재에 항거하던 한 정치인이 별세했다.

온갖 고초를 당하고, 민주화 세력의 지도자로 살았지만, 그것이 그의 직업이었고, 결국은 목표했던 대통령도 되고, 추종하던 세력들에게 단맛도 보여 주었으니, 그의 인생은 그만하면 성공한 인생이라 할만하다. 그러나 오늘도 깨어날지 말지 모르는 백노인은 20대 청춘부터 무슨 부귀영화를 노리고 싸워왔단 말인가, 이제 곧 손주를 볼 나이에 낙향하여 살고 있던 그를, 무엇이 시위현장에 다시 불러내어 또 다시 나를 부끄럽게 하는가.
#백남기 #민주화 #백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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