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불임금이 '원래 주어야 할 돈'이라면, 위자료는 '원래 주어야 할 돈을 주지 않아 벌어진 이 모든 일에 대한 배상'의 의미이다."
pixabay
이번 건도 처음에는 다른 알바 상담 사례와 별다를 게 없었다. 임금을 제대로 받지 못한 P씨와 처음 만나서 했던 일은 근무시간표를 확인하고 임금을 계산하는 일이었다. 2014년 7월 말부터 10월 11일까지, 2015년 4월 4일부터 6월 20일까지 주말마다 14시간에서 16시간을 일했다.
많이 일한 주에는 이틀 동안 21시간을 일하기도 했다. 긴 시간을 일했으나 시급은 2014년에도, 2015년에도 5천 원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최저임금보다 낮은 금액이었고, 주휴수당은 지급하지 않았다. 휴식시간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었다. 하나씩 짚어가며 계산해본 체불임금은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우리는 곧바로 내용증명을 발송하기로 했다.
2단계, 전반전 - 근로기준법 위반 내역 통보
P씨와 함께 내용증명의 내용을 구성한 것은 토요일이었다. 마침 당시 이틀 후인 월요일에 6월 임금이 들어오기로 되어있어서, 내용증명을 보내기 전에 들어오는 임금 액수를 보고 발송내용을 최종수정하기로 했다.
확인 결과 역시나 5천 원으로 계산된 임금이 들어왔고, 마지막으로 손을 본 내용증명을 보냈다. 내용증명에 포함된 고용주의 위법사항은 다음과 같았다.
'최저임금 위반, 주휴수당 미지급, 근로계약서 미교부, 임금지급 원칙 위반, 휴게시간 미제공.'내용증명을 보냄과 동시에 사장에게 "최저임금에 미달하는 금액만큼 임금을 지급하시고 주휴수당도 지급해주시기 바란다"고 카톡을 보냈다. 이에 대한 사장의 대답은 전형적이었다.
"애초에 니가 (시급)5000원에 일하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한 번도 최저임금을 달라고 얘기한 적이 없었으면서 왜 이제 와서 돈을 달라고 하는 것이냐? 저의가 의심스럽다. 그리고 마지막 그만둘 때도 제멋대로 그만둬서 내 손해가 크다."체불임금을 달라고 하는 알바노동자들의 말에 고용주는 대부분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 우선, 처음부터 최저임금도 안 되는 금액을 받고 일하기로 해놓고 왜 이제와서 돈을 달라고 하느냐고 묻는다. 줄 돈 다 주고 일을 시켜야 하는 것이었으면 애초에 일을 시키지 않았을 것이며, 그래서 자신은 돈을 줄 수 없다는 것이다.
덧붙여서 일하던 중에 있었던 사소한 실수들을 끄집어내며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기도 한다. 불법을 저지른 사람의 반응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파렴치하고 뻔뻔한 반응이지만, 안타깝게도 흔하게 볼 수 있는 장면이다.
해당 고용주는 카센터를 운영하는 사람이었다. 체불임금을 달라는 P씨의 카톡에 사장은 "카센터로 찾아오라"고 답했다. 경험적으로 이런 경우에는 알바가 혼자 찾아가 봐야 얻을 것도 없고, 되려 사장의 협박과 회유에 넘어가게 된다. 이런 우려를 P씨에게 전했고, 사장의 '찾아오라'는 말에는 이후에 응하기로 했다.
나흘 후 사장에게서 연락이 왔다. 우리가 발송한 내용증명을 읽고 나서 연락을 해온 것이다. 내용증명에 써놓은 임금체불과 근로기준법 위반에 대한 대답은 여전히 뻔뻔했다.
"내용증명에 들어간 사실 여부와 안 맞는 것들에 대해 다시 내용증명을 발송할 것임. 추가적으로 근로자의 과실에 대한 보상 관련 내용증명을 함께 발송할 것이므로 주소를 알려달라. 월요일 발송할 것이다."일관된 사장의 태도, 결국 고용노동부에 진정 넣었다내용증명에 대한 답장을 보내겠다는 사장은 드물다. 사장의 답장이 수상했지만 일단 주소는 보내주기로 했다. P씨의 집 주소가 아닌 노조가 우편물을 받을 수 있는 주소를 알려주었다. 이번 사례의 경우, 알바노동자가 청소년이어서 여러 모로 주의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성인인 고용주가 청소년 알바노동자를 심리적으로 압박할 수도 있다는 염려였다.
다음날 사장이 새로운 주소를 요구했다. 보내준 주소가 주거지가 아니라서 오배송의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내용증명은 배송에 실패할 수는 있어도 엉뚱한 사람에게 가지 않는다. 그런데도 사장은 굳이 집 주소 혹은 학교 주소를 요구했다.
우리는 사장의 이와 같은 요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집주소를 달라는 사장의 요구는 오배송에 대한 염려가 아니라, 사장이 '학교와 가정이라는 우회로를 통해 청소년인 P씨에게 위압을 가하려는 것'으로 알바노조측은 해석했다. 이를 통해 체불임금 요구를 무마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한 듯보였다. 실제로 많은 청소년들이 학교와 가정에 알려지는 것(본인이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을 두려워하여 체불임금을 포기한다.
그러나 P씨는 달랐다. 알바노조가 사장의 의도를 설명해주자, "상관없다. 나는 끝까지 내 돈을 받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학교든 집이든 알려지는 건 신경 쓰지 않는다"며 의지를 내비쳤다.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사장의 횡포가 걱정되었으나 P씨의 말대로 사장에게 학교 주소를 알려주었다. 그리고 다음 날 P씨와 알바노조 집행부는 사장이 오라고 했던 카센터로 향했다.
카센터는 매우 한적한 곳에 있었다. 그렇다고 아주 외딴 곳은 아니었고, 점점 더 많은 건물이 들어서고 있는 개발지역이었다. 우리가 찾아갔을 때 사장은 영수증, 계산기와 수첩을 펼쳐놓고 돈 계산을 하고 있었다.
알바노조 : 안녕하세요. 울산 알바노조에서 왔는데요. P씨가 못 받은 임금 다 정산해서 주셔야 합니다.사장 : 애초에 쟤가 최저임금보다 낮은 금액에 일하겠다고 했었다. 그런데도 돈을 다 챙겨줘야 하느냐? 그리고 쟤가 일하는 동안 지각도 자주 하고 근무태도가 성실하지 않았다. 그런데 무슨 돈을 더 주느냐? 무엇보다 갑자기 일을 그만두는 바람에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알바노조 : 그건 그거대로 계산하시더라도 근로기준법에 나와 있는 것들은 다 지키셔야 합니다.사장 : 아, 나는 모르겠고. 내가 입은 손해에 대해서 손해배상 청구할 테니 집 주소 적어놓고 가도록 하시라. 청소년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는 없으니 부모에게 배상을 받아낼 것이다. 지금 부가세 신고 기간인데 이거 문제 생기면 몇천만 원이 왔다 갔다 한다. 바쁘니 상대해줄 시간 없다. 법대로 해결하라.사장의 태도는 일관되게 '나는 잘못이 없고 손해만 입었다'는 식이었다. 사장의 뻔뻔함도 놀라웠지만, 더 놀라운 것은 P씨의 태도였다. 소송, 손해배상 등의 말들이 오가면 거기에 기가 죽거나 겁을 먹을 만도 한데, 그는 오히려 더 강하게 맞섰다.
"제가 잘못한 게 없는데 뭘 배상을 해요? 일한 돈이나 주세요!"그때였다. 우리는 P씨의 태도를 보고 확신을 했다. 그리고 '더 힘 뺄 것 없겠다. 이곳에서 기 싸움 해볼 필요도 없이 이번 건은 이미 이긴 것'이라고 판단했다. 사장의 일관된 태도와 P씨의 확고함을 확인한 우리는 곧바로 고용노동부에 진정을 넣었다. 이제 못 받은 돈을 받기까지 몇 가지 절차들만 남겨두게 되었다.
3단계, 하프타임 - 최저임금 위반 정황 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