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발생 당일 오후 올랑드 대통령이 비상 국무회의를 열어 "급선무는 테러리스트를 신속하게 체포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왼쪽) 올랑드 대통령이 집무실에서 수상과 내무부장관, 법무부장관 등에게 사태의 추이를 보고받으며 "테러리스트들을 두 곳으로 기습해 진압하라"는 방안을 말하고 있다.
프랑스TV
2015년 새해 벽두부터 프랑스는 테러의 공포에 휩싸였다. 풍자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Charlie Hebdo) 1177호가 발간된 지난 7일 이슬람 극단주의자 두 명이 이 잡지사에 총기를 난사하는 테러를 자행했다. 테러범의 총격으로 <샤를리 에브도>의 만화가와 편집자들, 그리고 정신분석가, 경제학자, 경찰 등 11명이 사망했고, 11명이 중경상을 입어 총 22명이 희생되었다. 이 테러는 프랑스 국민을 충격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사건이 일어난 오전 11시 30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은 엘리제궁 집무실에서 여비서로부터 국가가 비상사태에 처했음을 보고받았다. 2분 후 올랑드 대통령은 <샤를리 에브도>에 전화를 걸어, "내가 지금 바로 그 곳으로 가겠다"라고 전하며 신속한 행동을 개시했다.
그리고 대통령은 발스(Manuel Valls) 수상에게 전화를 걸어 두 가지 일을 요청했다. 하나는 테러리즘에 대한 대책 수단을 총동원해 줄 것, 다른 하나는 사건 발생 2시간 반이 경과한 오후 2시 국가 비상사태 국무회의를 소집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현장에 도착한 대통령은 경찰관·소방관들과 이야기를 나눈 후 이 테러의 상징적 파급력을 감지해 냈다.
테러 보고받고 2분 후 현장에 전화올랑드 대통령은 곧바로 텔레비전에 출연해 국민들에게 "내일(8일)을 국가 애도의 날로 정한다"고 공포했다. 이어 시시각각 내각의 장관-비서관들과 함께 사태수습을 위한 릴레이 회의를 진행했다. 대통령은 발스 수상과 카즈뇌브(Bernard Cazeneuve) 내무부장관, 토비라(Christiane Taubira) 법무부장관과 함께 대통령 집무실에서 실시간으로 사태의 추이를 보고받으며 테러진압 전략을 짰다.
올랑드 대통령은 "테러범들을 조속히 소탕하는 일이 최우선 과제"라고 판단하고 테러범들을 엄습하기로 결정했다. 대통령의 전략은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다. 두 명의 테러범들은 사살되었고 전 프랑스인들을 충격에 빠뜨린 '샤를리 에브도 테러사건'은 막을 내렸다.
이게 끝이 아니다. 테러가 진압된 뒤에도 올랑드 대통령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아프리카를 비롯한 전 세계의 지도자들을 파리로 초대하여 테러리즘에 대항하는 역사적인 '대행진'(grande marche)을 국가차원에서 조직했다.
2015년 1월 11일 일요일 파리 시내는 전 세계로부터 초대된 각국 지도자들과 시민이 손에 손을 잡고 행진하는 물결로 출렁였고, 프랑스 전역에서도 시위행진이 줄을 이었다. 테러에 대항하여 거리로 쏟아져 나온 3백만 인파의 연대 행렬은 프랑스를 세계사 속에 또 한 번 기록으로 남게 했다.
올랑드 대통령 리더십에 프랑스 국민 환호
국가가 위기에 직면했을 때 올랑드 대통령이 보여 준 리더십은 프랑스 국민의 관심과 사랑을 받기에 충분했다. 이는 대통령 지지율 급등으로 나타났다.
올랑드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은 취임 당시인 지난 2012년 5월과 6월 53%였다가 2013년 11월 21%로 하락했고, 2014년 12월에는 10%대인 18%까지 떨어져 프랑스 제 5공화국 역대 대통령 중 최하위를 기록했었다. 그러나 <샤를리 에브도> 테러진압 직후인 2015년 1월 16일 여론조사에서는 지지율이 38%로 급반전하면서 무려 21%p나 올랐다.
올랑드 대통령이 불과 10여일 만에 지지율의 대전환을 이룬 비결은 리더로서의 위기대처 능력이었다. 올랑드 대통령은 의연한 모습으로 신속하고도 적절한 조처를 취했고 공포에 떨던 국민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프랑스인들은 올랑드 대통령의 정치적 꽁뻬땅스(능력)와 결단력에 환호를 보냈다. 올랑드를 '좌파만의 대통령'이 아닌 전 국민의 대통령, "우리들(nous)의 대통령"이라 불렀다. 프랑스2 텔레비전의 인터뷰에 응한 프랑스인들은 "대통령의 진가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세월호 참사 때 드러난 한국 정부 무능에 국민들 충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