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희 전 통합진보당 대표가 지난 2014년 12월 24일 오전 청와대 입구 청운효자주민센터앞에서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강제해산 선고 이후 당원들에 대한 대대적인 국가보안법 수사를 규탄하는 기자회견 및 1인 시위를 벌였다.
권우성
지금으로부터 57년 전인 1958년은 한국 정치사에 있어서 암흑의 해로 기억된다. 1958년 1월 12일 새벽, 죽산 조봉암 선생을 비롯한 진보당 간부들에 대한 일제 검거 작전이 실시됐다.
진보당의 당수인 죽산은 은신 중인 터라 검거를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동지들의 체포소식을 듣고 자신이 도망을 가면 무고한 동지들이 피해를 입게 될 것이라면서 13일 오전에 전화로 자진출두 의사를 밝혔다. 이른바 '진보당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승만 정부는 죽산과 진보당이 '평화통일론'을 주장해 대한민국의 국시인 '북진통일'을 위배했으며, 북한이 밀파한 간첩과 접선해 '폭력혁명을 기도'했다고 주장했다. 조봉암 체포 후 진보당 사건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체포 1개월 만에 진보당은 전격적으로 등록 취소되어 해산 당했으며, 조봉암에 대한 재판은 사건이 발생한 지 채 2년이 되지 않아 3심이 모두 종료되었다. 결국, 1959년 7월 31일에 진보당 당수 조봉암 선생은 4·19혁명을 불과 몇 개월 앞두고 형장의 이슬로 산화했다. 물론 진보당과 조봉암에 대한 모든 혐의는 전혀 사실이 아니었다.
두 번의 '진보당 해산'한편, 반 세기가 흘러 2014년 대한민국에서도 똑같은 비극이 재현되었다. 박근혜 정부는 2013년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을 '내란음모' 사건으로 구속시킨 데 이어, 통합진보당 자체를 해산시키기 위해 헌법재판소에 '통합진보당 해산심판 청구안'을 제출했다. 정부 측 요지는 자주·민주·통일 등의 내용이 담긴 통합진보당 강령이 자유민주주의적 기본 질서에 반하는 북한식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것이며, 통합진보당이 그 목적의 달성을 위해 폭력혁명 수단으로 정권을 전복하려 했다는 것이었다.
헌법재판소의 박한철 소장을 비롯한 8명의 재판관들은 정부의 이러한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여 2014년 12월 19일 통합진보당을 전격 해산시킨 데 이어, 국민의 직접투표로 선출된 국회의원 3명에 대해서까지도 의원직을 박탈했다.
정부가 '해산심판 청구안'을 제출한 지 1년, 첫 공개변론이 시작된 지 11개월 만의 일이었다. 반 세기 전과 마찬가지로 해산 논리는 허술했지만, 심판의 과정은 기민했다. 또한 반 세기 전 1심에서 진보당 간부들에게 무죄를 선고한(조봉암에게는 불법무기소지죄로 5년을 선고) 유병진 판사와 마찬가지로 통합진보당 해산 반대 의견을 낸 재판관은 김이수 재판관 단 한 명 뿐이었다.
1958년의 진보당 해산과, 2014년의 통합진보당 해산 사이에는 이처럼 비슷한 논리와 사건들이 도처에서 발견된다.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역사를 배운다고 하지만 놀라우리만치 비슷한 이 두 편의 비극 앞에서 우리는 미래세대에게 '역사'에 대해 뭐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세 번째 비극의 재현을 막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두 사건을 복기해 볼 필요가 있다.
1. 집권세력의 견제잘 알려져 있다시피, 죽산은 1950년대 말 이승만의 최대 정적이었다. 1956년 치러진 3대 대선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한 조봉암은 유효표의 30%가 넘는 216만표를 득표했다. 이는 당시 선거가 이승만과 자유당에 절대적으로 유리했다는 점을 상기해 볼 때, 엄청난 이변이 아닐 수 없었다. "조봉암이 투표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졌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조봉암의 등장으로 이승만의 장기 집권이 불투명해지자, 이승만은 혁신을 통해 민심을 수습할 것인가, 극우반공체제를 더욱 강화해 파시즘으로 영구집권할 것인가 하는 갈림길에 놓이게 되었다. 애초부터 영구집권이 목표였던 이승만은 당연히 후자의 길을 걷게 되었고, 조봉암과 진보당은 그 희생양이 되어야 했다.
이승만은 진보당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하며 어떻게든 조봉암을 제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1월 14일 진보당 사건을 보고받고 "조봉암은 벌써 조치되었어야 할 인물이며, 이런 사건은 조사가 완료될 때까지 외부에 발표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라고 했다. 4·19 이후의 한 폭로에서는 "조봉암은 공산당이니 없애야 한다"는 이승만의 친필 쪽지가 육군 특무대장에게 전달되었다고도 밝혀졌다. 또한, 1심에서 조봉암에 징역 5년만이 선고되자, 이승만은 "책임 판사들을 처단해야"한다면서 격분하기도 했다. 이승만의 목적은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의 위법성을 밝히는 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직 조봉암이라는 인물을 제거하려는 데 있었던 것이다.
2014년의 통합진보당 해산 역시 박근혜 대통령의 의중이 해산 선고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주지 않았겠냐는 분석이 각계에서 나오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은 자유민주주의를 확고하게 지켜낸 역사적 결정"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 해산 논리의 빈약함은 헌법학자들은 물론 사회 각계에서도 숱한 질타를 받았다.
17만여 페이지에 달하는 증거와 변론자료들을 수개월 내에 검토해 판결을 내린다는 것 자체가 이 재판이 이미 모종의 결론에 도달해 있었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이번 판결이 지난 18대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를 노골적으로 공격한 이정희 후보와 통합진보당에 대한 보복이라고 여기고 있다.
특히 정당해산이 이처럼 일사천리로 진행된 데에는 집권 2년 차 들어 심각하게 약화되고 있는 박근혜 정권의 통치력을 종북공세를 통해 만회해 보려는 의도가 짙게 배어 있을 것이다. 박근혜 정권은 2014년 들어 기초노령연금 공약 파기, 세월호 참사 그리고 정윤회·십상시 국정농단 등의 사건을 겪으며 취임 이후 최악의 지지율을 보이고 있었다. 힘이 빠져가는 집권세력이 가장 쉽게 빠질 수 있는 유혹이 바로 종북몰이임은 지난 역사를 통해 숱하게 증명된 사실이다.
2. 보수 야당의 부화뇌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