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티 준비부터 진행, 댄스무대까지 준비해주신 TIMES-SLC 선생님들. 아버님이 굉장히 고마워 하셨다.
이소연
파티 도중 해프닝이 하나 있었다. 파티가 한창일 무렵, 맥주가 동나 버렸다. 고작 오후 11시쯤이었다. 이제 막 무르익기 시작한 파티 분위기를 봤을 때, 맥주가 떨어질 시점이 아니었다. 파티를 주최한 가족들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파티 분위기를 깰 수도 없고, 당장 방법도 없어 급하게 맥주 다섯 박스를 더 구매했다. 그렇게 수상한 냄새가 폴폴 나는 해프닝은 미봉책으로 마무리됐다.
그리고 파티 다음 날, 숙취와 피로에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아버님은 담배 한 갑을 사러 동네 구멍가게에 갔다. 그 구멍가게 주인은 그의 오랜 친구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주인이 말하길, 어제 가게 뒤 공터에서 동네 청년 세 명이 출처를 모를 맥주 여섯 궤짝을 쌓아놓고 병당 20페소씩 팔았다고 한다.
필리핀에서 맥주는 보통 편의점 기준 1병당 30~50페소 가량한다. 그 맥주가 잔치용 맥주라는 사실을 단박에 알아차리고, 화가 머리끝까지 난 아버님은 그들을 집으로 불러냈다. 맥주 도둑들은 한 동네 젊은이들로, 돈을 들고 도망을 간다거나 발뺌을 할 머리도 안 되는 허술한 도둑들이었다. 잔칫집이 정신이 없는 틈을 타 맥주 여섯 궤짝을 빼돌린 것이었다. 나는 여기까지 듣고, 뒤를 재촉했다.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부자 할아버지의 처사가 궁금했다.
"만일 이런 파티가 있다면, 다시는 초대하지 않겠다고 하셨어. 그들은 이제 환영받지 못하는 손님이 된 거야."그게 다였다.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맥주 값을 도로 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경찰에 신고한 것도 아니었다. 자칫했으면 파티를 망치고 망신을 당할 뻔했다. 그런데 그게 다였다.
그는 이 동네 사람들의 처지를 알고 있었다. 그 청년들에게 먹을 것이 없어 배를 주리고 있는 가족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청년들은 맥주를 빼돌려서 본인들이 마시고 즐기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할아버지는 잔치 음식을 비닐봉지에 가득 싸서 집으로 챙겨가는, 얼굴조차 잘 모르는 옆 동네 사람들을 보아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아이스크림 냉장고 옆에 앉아 파티가 끝날 때까지 계속 퍼먹던 노숙자 노파를 보아도 입을 열지 않았다. 생일이고, 잔치였기에 신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들과 나누려 한 것이었다.
모두가 즐기고 있는 잔칫날에서까지도 맥주를 빼돌리느라 가슴을 졸였을 그 청년들을 생각하면 우습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했지만 안타까운 마음이 가장 크게 들었다. 필리핀의 현실이었다. 생일 주인공의 아량이 넓어 '환영받지 못할 손님'으로 마무리됐지만, 운이 안 좋았다면 '범죄자'가 될 수도 있었다. 나는 이런 해프닝이 있었다는 것을 사건이 모두 해결된 후에야 알게 됐다.
아무튼 필리핀의 환갑잔치는 그렇게 끝났다. 다양한 사람들, 어떻게 보면 또 거기서 거기인 평범한 사람들이 함께했다. 색다른 점도 있었지만 역시 사람 냄새가 나는 그날, 그곳, 그 사람들의 뜨거운 '잔칫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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