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 표지
한겨레출판
유신은 1970년대 한국 독재체제의 다른 이름이다. 오늘날 많은 한국 사람들은 종종 유신시대를 낭만화하기도 한다. '새마을운동', '수출위업 100억 불', '아시아의 네 마리 용' 등의 용어들은 비록 정치적으로 독재의 시대였으나 지지리 못살았던 보릿고개를 벗어던지며 경제적으로 급성장하던 1970년대를 표상하며, 박정희 대통령을 칭송할 때 사용되곤 한다.
우리에게 유신시대는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화석화된 역사인가? 이에 한홍구 교수는 단호히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유신의 겉과 속을 샅샅이 꿰뚫는다. 여기에서 나아가 유신은 끝나지 않은 정도가 아니다. 지난 연말 한홍구 교수의 '돌직구'에 따르면 유신세력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엘리트집단은 '바퀴벌레'요, '오뎅국'과 다름 아니다(<한겨레>(인터넷판) 2013. 12. 27.).
오뎅국에 대해서는 한 교수와 한 차례 논쟁 아닌 논쟁을 벌였다. 내 주장에 따르면 오뎅국은 500원이면 허기진 누구라도 달래줄 수 있는 민중의 애환이 담긴 음식이자 귀한 기호품이기 때문에, 엘리트집단이자 유신세력으로 비유될 수 없다. 반면 '온갖 환경 변화에도 굴하지 않고 3억2천만 년 동안 살아남았다는 지구의 터줏대감'인 위대한 바퀴벌레에 대해서는 거의 공감한다. 우리는 2000년대 초 잠시 민주주의라는 다소 위생(?)적인 집에서 살게 되자, 바퀴벌레가 거대한 지하에서 꿈틀거리고 있음을 잊었다.
한국과 일본의 다르지만 다르지만도 않은 망각의 역사 최근에도 뉴스에서 "역사 잊는 자 미래 보지 못해⋯"라는 이야기를 접했다. 이 이야기는 일본 정부의 역사 왜곡에 대응하여 1월 28일 한국 외교부가 발표한 성명문의 한 구절이다. 일본의 야스쿠니신사 참배나 역사 왜곡, 독도에 대한 거짓 주장은 너무 심각해서 일일이 대응하기조차 한심할 지경이다. 이는 한일관계만이 아니라 중일관계를 넘어 아시아 전체 국가와 시민에 대한 도전이고, 평화와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세계인들에게 날강도 짓을 하는 격이다.
일본의 극우들은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한 이후에도, 소위 '대동아공영권'의 구상과 이를 실행하기 위한 침략전쟁인 태평양전쟁을 서구 열강의 식민 제국주의에 대항하기 위한 저항이라고 호도해왔다. 또한 한국 병합 역시 서구의 침략으로부터 조선을 구하기 위한 조치라고 강변해왔다.
2011년 일본 NHK의 아침드라마 <오히사마(おひさま: お日様 해님)>를 비롯해 태평양전쟁을 배경으로 하는 일본의 드라마 등에서는 전시 일본서민들의 고통과 생활상의 어려움에 초점을 맞춰, 고난 중에도 해처럼 밝게 살자고 강조할 뿐이었다. 전쟁의 발발원인이나 일본의 침략 문제에 대한 어떤 비판도 발견하기 어렵고, 은연중에 원자탄 투하 사건을 통해 일본이 전쟁의 피해국임을 내세워왔다.
그런 사회적 분위기가 일본 시민이나 청소년, 대학생 대다수에게 내면화되어,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식민지 한국인이나 아시아인들에게 저지른 범죄행위를 잊어가고 있거나 잊고 싶어 했다. 식민지배와 침략에 대한 인정을 회피한 아베 신조(安倍晋三) 수상이나 "위안부 문제는 어느 나라나 다 있었다"고 한 모미이 가츠토(籾井勝人) NHK 회장 같은 이들의 파렴치한 발언과 행위는 이러한 일본인들의 마음에 불을 지피며 그러한 세력이 바퀴벌레처럼 활개를 치도록 만들고 있다. 우리가 도출할 수 있는 결론은 간단하다. "잊으면 반복된다."
역사를 잊으면 역사는 반복되고 비극은 다시 온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를 배우고 기억해야 한다. 또 잘못된 역사에 대해서는 진실규명과 사과, 화해, 역사 기록 등과 같은 노력을 해야 반복되는 비극을 막을 수 있다. 그러한 입장에서 2000년대 중반까지 과거청산 노력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2008년 이래로 급작스럽게 과거청산운동의 막이 내려졌다. 그 막이 내려지고 나자 마당에는 다시 '바퀴벌레들'이 올라와 과거보다 더 세찬 힘으로 날갯짓을 하며 과거청산운동과 기록을 갉아먹고 번식하고 있지 않은가, 종 치며, 북 치며.
잊지 않기 위해 쓰는 한홍구의 <유신>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한홍구 교수의 <유신>(한겨레출판사, 2014)은 1970년대사이다. 1970년대 역사서 가운데에는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 2, 3권, 인물과사상사, 2002),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의 <1970년대 전반기의 정치사회변동>(백산서당, 1999)과 <1970년대 후반기의 정치사회변동>(백산서당, 1999) 등이 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대의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책이 1970년대 역사를 동태적으로 고찰한 학술서이므로, 대중적 호흡을 하고 있는 한홍구의 이 책은 강준만의 책과 가깝다. 2000년대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주류 정서를 설명하는 입장에서 1970년대를 바라본다는 점에서 강준만의 책과 한홍구의 책은 출발점에서 유사하다. 그러나 강준만의 정치적 입장과 한홍구의 입장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강준만은 1970년대를 긍정만도 부정만도 하지 않는 입장에서 접근했다. 그러나 한홍구는 진정한 과거청산을 통하여 새 역사를 여는 길이 우리 모두의 삶의 길임을 강조하는 절박한 입장에서 유신을 현재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한홍구의 <유신>이 갖는 특징을 짚어 보도록 하자. 우선 이 책은 집합지성의 산물이다. 물론 집필자는 한홍구 개인이다. 그러나 이 책은, 책의 추천사에서 이만열 선생이 기록하듯, 이만열, 서중석, 안병욱, 정해구, 서해성, 이부영 등과 같은 한국의 대표적인 지성들의 절박한 고민과 기획의 산물이다.
이만열 선생은 1970년대 진보적 관점의 기독교사를 연구하며, 보수화되고 유신을 찬양하던 분위기에 저항했다. 그의 활동은 당시 싹트던 민중신학 연구의 촉진제가 되었다. 그러한 활동으로 인해 그는 1980년대 신군부 등장과 함께 해직되어 고난의 길을 갔다. 그리고 2000년대엔 국사편찬위원장으로서 과거 권위주의시대에 은폐되고 억압된 자료를 발굴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 대표적인 역사학자이다. 그가 발굴한 사료를 통해 과거청산운동을 할 수 있는 기초를 다졌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진보 사학계를 이끌고 있으며 2000년대 과거청산운동을 선두에서 실천한 대표적인 역사학자인 서중석 선생과 안병욱 선생은 모두 유신체제를 반대하며 투쟁한, 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의 피해자들이 아닌가. 이부영 전 국회의원 역시 1970년대 <동아일보>에서 해직된, 동아투쟁위원회의 리더 격 기자였다. 이들은 1970년대 유신의 잔혹함을 생체험한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유신에 평화적으로 저항했던 지성들이었다. 이들의 경험과 지성이 어우러져 2012년 한홍구는 격무 중에도 <한겨레>에 격주, 또는 매주 연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