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외갓집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외갓집. 집은 낡았는데 집 뒤에 있는 소나무는 여전히 푸르다.
여정희
"야가 그 아프다던 손녀딸이가? 이키 건강하게 돼가 다행이다."나는 멋쩍게 웃었다. 실은 건강하지 않았다. 몇 년째 병명도 알 수 없는 통증으로 밤을 지새워야 했고 이 병원 저 병원 다니는 일도 여전했다. 조금 좋아졌다 싶으면 다시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일이 반복됐다. 우울감과 좌절감에 허덕이다 답답한 일상의 공간을 떠나고 싶어 시골 외갓집으로 간 거였다. 시골 냄새가 그리웠고 흙길 밟는 소리가 듣고 싶었다.
이전에 요양 삼아 두어 달 외할머니의 보살핌을 받은 적이 있었다. 외할머니는 누워만 있던 내게 오셔서 내 배를 만지시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셨다.
"요 뱃속에 있는 내장을 다 꺼내가(꺼내서) 맑은 냇물에 설렁설렁 행가가(행궈서) 다시 넣으면 안 좋겠나."살아날까 싶었던 그 손녀딸이 이렇게 밭일까지 거들어 줄 정도가 됐으니 얼마나 기쁘셨을까. 하지만 속으로는 미안했다. 겨우 걸을 수 있을 정도의 힘만 가지고 이곳엘 왔으니…. 다행히 그때는 밭일을 거들 수 있을 만큼 알 수 없는 힘이 생겨났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다시 지긋지긋한 투병이 시작되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참 의아한 일이다.
"야가 그 아프다던 손녀딸이가?" 우리 외할머니는 꼬부랑 할머니다. 마흔 둘이라는 젊은 나이에 감나무에서 떨어져서 허리를 다치셨다. 그 이후로 허리 한번 펴지 못하고 지팡이를 짚고 다니신다. 허리를 펴지 못한다는 것.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이 고통을 알 수 없다. 등과 허리에 하루 종일 쌓아 놓았던 무거운 피로를, 딱딱한 바닥에 누워 큰 대자로 뻗어 한 번만이라도 잘 수 있다면 싹 날려 버릴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럴 수 없다. 매일같이 새우잠을 자야 한다. 이렇게 힘든 하루를 수십 년 동안 보내셨을 그 고통과 피로를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나도 허리 펴지 못한 세월을 몇 년을 보내고 나서야 이 고통을 알았다. 난 매일매일 살기 싫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20대라는 나이가 더 싫었다.
등이 굽은 우리 외할머니는 일밖에 모르시는 외할아버지의 잔소리를 들으며 논일, 밭일 다 하셨다. 게다가 장손 며느리였던 외할머니는 도시로 시집간 딸년들의 아이들까지 키워내야 했다. 방학 때마다 찾아오는 너덧 명의 손주들 뒤치다꺼리도 마다하지 않으셨고, 시골 반찬이 도시 아이들의 입맛에 맞을까 늘 염려하셨다. 작고 딱딱한 곶감만 주셨던 외할아버지와는 달리, 바지 주머니 속에 몰래 감춰두었던 말랑말랑하고 큰 곶감을 손주들 손에 살짝 쥐어주곤 하셨다.
큰 키, 툭 불거진 광대뼈, 여성스러움과는 거리가 먼 외할머니는 성격도 외모만큼이나 투박했다. 남들에게 잘 보일 줄도 모르고 말도 예쁘게 포장할 줄 몰랐다. 이런 탓에 주변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사람을 가려서 대하거나 계산 같은 건 할 줄 모르는 그저 순박한 시골 아낙이었다.
"아이고 우째 할매가 만 원밖에 안 주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