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군부가 친무르시 시위대를 강제 진압하는 과정에서 수백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연합뉴스
'우리 민족은 안 된다'는 말 들어보셨을 겁니다. 당파싸움, 지역감정부터 시작해 안 되는 이유가 백가지도 넘을 겁니다. 이런 얘기들은 대부분 '일본은 다르다, 미국은 다르다'로 끝나게 됩니다. 일종의 식민사관이죠. 이러한 '자해성 인식'에 저항하는 것이 '한국사회 생각의 블랙리스트'를 파헤치는 첫 걸음입니다.
보릿고개라는 말 들어보셨을 겁니다. "누구 덕분에 보릿고개를 넘은 줄 아냐"란 말도 들어보셨나요? '미국 원조 덕'에 우리가 이 정도 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나이 지긋한 어른들만 이 이야기를 하시는 건 아닙니다. 대학생들도 '미국 원조+박정희'가 경제발전의 원동력이라는 공식에 이렇다 할 반박을 하지 않죠. 우리 부모님들, 열심히 사신 분들입니다. 우리 민중들, 뼈 빠지고 등골 휘게 노동하며 살았잖아요. 그렇게 농사짓고 공장 돌려 이만큼 산다고 생각 안 합니다. 우리 힘으로 살았다는 생각을 갖지 못하는 것이죠.
첫 번째 이유는 미군정이 해방 이후 다 쓰러져가는 식민지 조선을 일으켜 세웠다고 배우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미군정 법령 33호 '조선 내 소재 일본인 재산권 취득에 관한 건' 제 2조를 보면 "1945년 8월 9일 이후 일본 정부, 그 기관 또는 그의 국민, 회사, 단체, 조합 등이 소유 관리하는 전 재산 및 그 수입에 대한 소유권은 1945년 9월 25일부로 조선 군정청이 취득하고 조선 군정청이 그 재산 전부를 소유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공장, 토지가 미군정에게 넘어가게 됩니다.
한 예로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1>(박세실, 돌베게)에 따르면 미군정 산하의 신한공사 소유지의 쌀 생산고는 1947년 전체 생산량의 25%에 달했고 매년 막대한 소작료를 거두었습니다. <한국경제의 전개과정>(김윤환 외, 돌배게)에 따르면 남한의 공업은 1948년 기준으로 1941년에 비해 기업체 수는 60%, 고용자수는 70%, 생산액은 83% 각각 감소되었다고 합니다. 미군정이 토지를 가져가선 소작료로 막대한 이익을 챙겼고, 공장을 가져가선 실업자를 양산했다는 말이 됩니다. 우리가 배운 것과는 정반대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미국이 잿더미가 된 한국경제를 살려줬다고 배우기 때문입니다. 과연 사실일까요? <한국현대사2>(한국역사연구회 현대사연구반, 풀빛)에 따르면 한국전쟁 후 미국의 대한원조 중 군사 혹은 준군사원조가 80% 이상을 차지했습니다. <지역통합전략>(허버트 P. 빅스)에 재밌는 글이 있습니다.
한국의 방위지원을 위한 기금의 투입량이 증가할수록 궁극적으로 우리는 그 지역에 우리 군사력을 유지시키는 데 필요한 비용을 지불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즉 미국은 한반도에서 자기 군사력을 유지시키는 비용을 원조라는 명목으로 지불한 것이죠. 그리고 1955년 5월 체결된 '한미잉여농산물 원조협정'에 따른 미국 잉여농산물의 막대한 유입은 농업파괴와 이농현상을 일으켰습니다. 1954년에 작성된 '한미합의의사록'의 한국 이행 4항 "투자기업의 사유제도를 계속 장려한다"는 조항은 독점자본의 진출 길을 열어준 것입니다. 일본인 한 학자(岡倉古志郞)는 <신식민주의의 제형태>라는 논문에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미국은 경제원조를 발판으로 한국의 재정경제를 지배하게 된 이래 전후 20년 사이에 약 35억 달러의 경제원조를 한국에 투입하였다. 하지만 미국이 그 대가로 한국으로부터 얻어낸 재화는 대략 100억 달러에 상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사회주의 소련과 중국의 진출로부터 일본을 지켜야 했으며 일본의 방패막이로써 한국이 필요했던 것이지요. 결과적으로 박정희는 미국의 대리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한국현대사2>에 따르면 1967년부터 1971년까지 진행된 2차 경제 개발계획은 투자재원의 40%를 해외에 의존했고 1971년엔 외환수입의 13.3%를 이자와 원리금 상환에 쓸 정도로 상환압박이 갈수록 심각해졌습니다. 또한 차관에 의해 설립된 기업은 대부분 미국의 퇴행산업이었기 때문에 1969년 기준으로 차관기업의 45%가 부실기업으로 판명 났습니다.
잘못된 개발로 인한 인플레를 농민에게 전가시킨 저곡가 정책은 농촌을 파괴했고, 1970년대 초까지 국민소득의 실질적인 감소를 가져왔습니다. 그나마 박정희 정권의 숨통을 틔어준 것은 파병의 대가인 '베트남 전쟁 특수'와 중동의 오일달러를 벌수 있었던 중동 건설 붐이었던 것이죠. 그리고 1980년대 들어 미국의 제조업 활성화를 위한 '프라자 합의' 이후 3저 호황의 곁불을 쬔 것이 그나마 본 '미국 덕'입니다.
미국의 경제원조가 우리를 살렸나요?하지만 그 대가는 혹독하죠. '론스타 5조 원 먹튀도 눈뜨고 당하는 현실, OECD국가 중 자살률 1위, 식량자급률 최하위권, 청년고용률 24%, 성장동력이 소멸됐다는 매킨지 보고서, 비정규직 1000만'이 우리가 치르고 있는 대가입니다. 자립하지 못하는 경제가 된 것이죠. 경제발전은 우리나라 민중들의 피와 땀으로 된 것입니다. 그것을 빼앗아가는 다른 나라가 있었을 뿐입니다.
이제 식민사관에서 벗어나 민족을 다시 발견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가 못나서, 다른 '훌륭한 나라'가 도왔다는 '자해성 인식'과 결별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훌륭한 나라'의 대표 격인 미국이 2차 세계대전 이후 개입한 나라들의 역사적 유사성을 찾아보는 것은 도움이 될 듯합니다. 가장 가까운 예로 최근 유혈사태가 벌어진 이집트를 들 수 있습니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선거로 선출된 무르시 대통령이 군부에 의해 축출당하기 몇 시간 전 한 아랍 국가 외무장관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자신을 '미국의 특사'라고 밝힌 이 외무장관은 입법권과 지방 통치권한을 갖는 새로운 총리와 내각을 구성하는 방안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했으나 무르시 대통령은 거부했습니다. 무르시의 외교보좌관인 아삼 엘다하드는 앤 패터슨 미국 대사와 수전 라이스 백악관 안보보좌관에게 전화를 걸어 "무르시가 미국의 제안을 거절했다"고 전했고, 곧 군부 쿠데타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미국은 아직 '쿠데타'란 표현을 쓰지 않고 군부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이 쿠데타에 저항하는 4천여 명(MBC 8월 15일 보도 기준)의 사람들이 지금 거리에서 군부의 총칼 아래 쓰러지고 있습니다.
1973년 미국의 승인 아래 칠레의 사회주의 정권을 무너뜨리고 군사쿠데타로 권력을 가진 피노체트의 유혈통치 기간 공식 확인된 희생자만 3197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2002년 4월 베네수엘라 군부가 우고 차베스 대통령을 체포 억류하여 군부 쿠데타를 기도했을 때 차베스가 억류되어 있던 오르키아 섬 공군기지에 미국 비행기가 착륙한 기록이 있으며, 쿠데타 동안 베네수엘라 해상과 영공에 미국 함대와 비행 편대가 포착된 레이더 영상이 있었다고 베네수엘라 정부는 공식적으로 밝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