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포럼공동대표 이영훈(오른쪽 두번째) 서울대 교수가 2008년 3월 25일 오전 서울 세실레스토랑에서 '대안교과서'로 완성한 '한국 근ㆍ현대사' 공식 출간과 관련해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이영훈 교수는 대표적인 식민지근대화론 옹호 학자다.
연합뉴스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해 들어보셨나요? 일본 제국주의가 우리의 발전을 촉진시켰고, 그 역사적 경험이 해방 이후 한국 자본주의 성장의 기반이 됐다는 견해입니다. 놀라실지 모르겠지만 이런 주장을 하는 학자가 서울대학교에서 교수를 하고 있습니요. 학계, 정치계, 경제계에 있는 상당수의 실력자들이 동의하니까 가능할 테지요. 이들의 주장은 한마디로 못 배우고 무능력한 조선 사람들에게 일본이 철도도 놓아주고, 공장도 지어줬다는 것입니다.
명백한 사실부터 보겠습니다. <한국의 역사>(조선사연구회 엮음, 조성을 옮김, 한울)를 보면 1931년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간도에서 소작료 인하를 요구하는 조선사람 4만명을 학살했다고 나옵니다. 또 군량미로 쓰기 위해 쌀 생산고의 43.1%(1941년), 45.2%(1942년), 55.7%(1943년), 63.8%(1944년)을 빼앗아 간 기록도 나옵니다.
브루스 커밍스가 쓴 <한국전쟁의 기원>(김주환 옮김, 청사)에서 인용한 1932년 3월 27일 <조선일보> 기사를 보면 '덕원(함경남도 소재)에서만 2만 명이 굶어죽어 가고 있다. 집 안에 앉아서 죽음만 기다릴 수는 없기에 200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은 거리를 헤매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조선총독부의 보고의 의하면 1938년 농촌인구의 80%가 소작인이었는데 최고 9할에 이르는 소작료와 고리대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당시 실업률은 50%가 넘는다는 보고도 있습니다. 일본에 강제로 끌려가 노예노동에 시달린 사람이 1945년에 236만5000여 명에 달했습니다. 과연 누가 원한, 누구를 위한 '근대화'일까요?
물론 조선은 문제가 많은 봉건국가였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힘으로 충분히 발전할 수 있었어요. 사대적이고 무능력한 왕조와 새 시대를 갈망하는 민중들은 엄연히 달랐습니다. 동학농민운동 얘기를 해 볼게요. 1894년 7월 6일 전라감사 김학진과 전봉준이 합의한 폐정개혁안에는 "탐관오리의 그 죄목을 조사하여 하나하나 엄징할 것", "횡포한 부호들을 엄징할 것", "'노비문서는 태워버릴 것", "무명잡세는 모두 폐지할 것", "왜와 내통하는 자는 엄징할 것", "공사채를 막론하고 지난 것은 모두 무효로 할 것", "토지는 평균으로 분작하게 할 것" 등이 담겨 있습니다.
어떤 것은 지금도 시행되지 못할 정도로 진보적인 것들이지요. 이런 것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자 전라도 전역(나주 제외)에, 경상도, 충청도에 집강소를 설치해 개혁안을 실행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수도 한양으로 진격하던 중에 왕이 끌어들인 일본군대의 화력 앞에 쓰러졌습니다. 민중이 사회를 개혁하고 나서면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법입니다. 이걸 막은 게 바로 일본과 반민족세력입니다. 결론은 우리가 못 배우고 무식한 것이 아니라 침략당한 것입니다. 일본이 방해한 것이죠.
8·15 해방은 미국의 원자폭탄 덕분일까요우리는 원자폭탄 투하로 8·15 해방이 왔다고 배웁니다. 원자폭탄을 터뜨린 게 미국이니까 38선 이남을 미군이 점령한 게 뭐 이상한 일이냐는 논리도 있습니다. 이러다 보면 우리 민족의 힘이 약해 미국의 힘을 빌어 해방을 맞이한 게 됩니다. 그러니까 한국에서 미국이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인식도 있지요.
하지만 <한국의 역사>에 따르면 조선총독은 "조선이 가령 제2전선의 화약고인 이상 전황이 불리하게 되면 언제고 폭동화 되지 않는다고 할 수 없다"라고 우려했다고 합니다. 시간이 갈수록 조선민족의 독립열망이 커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한국의 역사>에 나오는 조선총독부의 통계에 따르면 1931년에서 1936년까지의 '항일무장대'의 출몰 회수는 2만3928회, 전투에 참여한 연인원은 136만9027명, 탈취한 총기는 3179정에 이르렀습니다.
<한국전쟁의 기원>에는 1930년에 접어들어 약 16만명의 항일 무장부대가 만주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식민지 조선 인구의 9할은 농민이었습니다. <1930년대 민족해방운동>(거름)이란 책에 당시 농민조합의 규모와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자료가 나옵니다. 함경도 내 정평군에서는 자작농의 21%, 소작농의 54%, 자작농 겸 노작농의 29%가 농민조합에 가입하고 있었으며, 이들이 비합적 지하운동 형태를 취하고 있었던 점에 비추어 본다면 결코 낮은 수준이라 볼 수 없습니다.
해방 직후 상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한국현대사1>(한국역사연구회 현대사연구반, 풀빛)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옵니다.
인민위원회에 대해 가장 선구적이며 포괄적 내용을 갖는 것은 브루스커밍스의 연구이다. 남한의 군(郡) 중 거의 50%에 이르는 군에서 인민위원회가 실질적인 통치력을 행사했다고 한다.1945년 9월엔 1000명이 넘는 대표들이 모여 '조선인민공화국'의 창건을 선포하고, 일본 제국주의 법률 폐지, 친일협력자 및 민족반역자 토지 몰수, 철도 통신 금융기관의 국유화 등을 추진하겠다고 밝히기도 했어요. 여기서 한 가지 유추해볼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남한의 50% 이상 지역에서 통치력을 발휘하고 '공화국'까지 선포한 자발적인 민중들의 건국역량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일까요? 브루스 커밍스의 연구에 따르면 경북 영양군의 군민 80%는 인민위원회 소속이었다고 하는데 이런 조직적 토대를 가지고 일제에 숨죽이고 가만히 있었을까요?
답은 의외로 간단하게 찾을 수 있습니다. 이 인민위원회 조직들은 1946년 미군정에 의해 말살당하게 됩니다. 그들은 미군정에 예속되기를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겠지요. 분명히 인민위원회는 민족의 자주·자치 역량이었던 겁니다. 이 외에도 일일이 열거하기조차 힘든 자료들이 많습니다. <한국경제의 뿌리와 열매>(박세길, 돌베게)에는 당시 신문자료를 인용해 1945년 11월 남한에 728개의 공장관리위원회가 구성되었고, 거기에 8만8천 명의 노동자들이 참여했다고 합니다. 당시 노동자의 수는 10만 명 정도로 추산되니 그 에너지가 상상이 갑니다.
해방 이전에 조선총독도 조선 땅을 '제2전선'이라고 걱정할 만한 민족자주 에너지가 우리에겐 있었습니다. 그것을 탄압한 세력이 공교롭게도 '우리를 해방시킨' 미국이었구요. 그렇다면 8·15 해방이 원자폭탄 덕분이라느니, 미군 덕분이라느니 하는 것은 누가 만들어낸 말인지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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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해방은 정말 미국의 원자폭탄 덕분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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