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를 두는 할아버지들옆방의 민요수업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바둑 대국에 열중하는 할아버지들. 시골 경로당에서는 여전히 칠십세, 팔십세가 되도록 남녀 부동석인가 보다. 언제나 할아버지들 따로, 할머니들 따로 노신다.
김혜정
바둑을 두거나 약주를 드시는 할아버지들을 두고 할머니들도 의례히 그러려니 수업에 들어오라 부르지도 않았으려니와, 할아버지들도 아예 할머니들과 섞여 앉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사실이라 믿는 듯, 어디까지나 '따로' 놀았다. '남녀 칠세 부동석'이 칠십, 팔십이 되도록 지켜지고 있는 듯...
아무튼 기분좋게 적당히 취한 '여학생'들이 술기운에 힘입은 나머지 명랑이 극에 달하여 소리선생 박승래씨를 요란하게도 맞이하는 것이었다.
"아이고 우리 어머님들 발씨 막걸리 한 사발 씩이나 잡쉈능갑만요. 막걸리 어따 감추셨소? 혼자만 잡숫지 말고 나조까 줘야제...쩌그 대상리에서 막 떠들고 소리하고 왔더니 목이 탕만."소리선생의 진심인지, 농담인지 모를 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학생들 간에 뜨거운 논란이 일어났다. 막걸리를 지금 가져다 주라커니, 수업시간이라 안 되니 끝나고 줘야 한다커니, 선상님이 농담으로 한 말인데 아모렴 그걸 고지 듣냐커니, 농담은 무슨 농담, 을매나 목이 말랐으면 저런 소릴 다 하겠냐커니, 의견이 분분하였다.
오늘 수업 되겠나 싶은 기자의 짧은 생각도 잠시, 역시나 어떠한 상황에서도 능란하게 대처하는 박승래씨가 북을 잡고 판소리 '심청가'의 눈대목인 '심봉사 눈 뜨는 장면'을 맛뵈기로 들려주는 것으로 얼른 분위기를 휘어잡았다.
아, 우리 판소리의 그 우수함이라니... '여학생'들은 소리선생이 분위기 제압용으로 구성지게 뽑아대는 심청전의 한 대목에 금세 도취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탁월한 그의 소리연기가 펼쳐 놓은 장면은 궁궐 맹인잔치에 초대된 심봉사가 눈을 뜨고는 왕비가 된 딸 청이의 모습을 난생 처음으로 보게 된다는 극적인 장면이었음에랴!
이렇듯 천지조화로 심봉사가 눈을 뜨고 나니 만좌 맹인이 모다 개평으로 눈을 뜨는디'아니리'로 상황 설명에 이어 빠르게 자진모리 장단으로 몰아가며 그의소리는 계속되었다.
만자 맹인이 눈을 뜬다 전라도 순창 담양 새갈무 띠는 소리라 그저 짝짝 허드니 모다 눈을 떠 버리난디 석 달 안에 큰 잔티에 먼저 와서 참예하고 내려간 봉사들은 저의 집에서 눈을 뜨고 미처 당도못한 맹인 중로에서 눈을 뜨고 천하 맹인이 눈을 뜨는디 가다 뜨고 오다 뜨고 앉아 뜨고 서서 뜨고 어쩐가 보느라고 뜨고 천하 맹인이 눈을 뜨고 지어비금 주수라도 한 날 한시에 눈을 떠서 광명천지가 되었구나그토록 많은 가사를 어찌 다 외워 부르는지, 입에다 모터라도 달았는지, 그 빠른 장단을 어찌 또박또박 발음해 부르는지, 그의 소리는 그가 지금 부르고 있는 심청가 가사처럼 '가다 뜨고 오다 뜨고 앉아 뜨고 서서 뜨고 어쩐가 보느라고 뜨고 천하맹인이 눈을 뜨고'도 남게 할 것만 같았다.
어찌나 구성지게, 또 실감나게 소리를, 연기를, 잘 하는지 심봉사가 눈을 뜨는 대목에 이르러 여학생들은 일제히 '와아' 박수를 치며 환호하였다. 개중에는 눈물을 찍어내는 할머님도 있었다. 그렇게 분위기 제압에 성공한 박선생은 올 겨울 들어 남원시 관내 경로당 100여 곳 가까이 순회하며 축적한 자신만의 노하우로 능숙하게 수업을 진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리산 또랑광대 박승래는 어느 대목에선 똑 부러지게 민요를 전수하기도 했으며 또 어느 필요한 대목에서는 북채를 놓고 일어나 백발의 제자 관객들 앞에서 온 몸을 던진 혼신의 연기를 펼쳐 보이기도 했다.
12월부터 시작해서 일주일에 닷새, 하루에 경로당 두, 세 군데씩을 돌았다고 하니 프로그램이 끝나는 시점인 2월 말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현 시점에서 계산해 보자면 그간 그가 방문한 경로당 숫자만 해도 족히 100여 곳은 된다는 계산이 어렵지 않게 나온다. '모두 몇 군데나 돌았냐'는 질문에 '세어보지 않아 잘 모르겠다'고 대답한 그였지만 말이다.
노인들을 대상으로 한적한 시골마을을 돌며 석 달 가까이나 같은 매뉴얼로 소리강습을 한다는 게 결코 쉽지 않았을 텐데도 불구하고 어르신들이 기다리고 있는 경로당을 찾아가 매일 같이 만나는 일은 매 순간이 새롭고 행복했다고 한다. 실제로 자신의 어머니 연배이신 경로당의 어르신들을 만나는 덕에 몸은 힘들었지만 오하려 자기가 더 즐거울 때도 많았노라고 고백한다. 그런 그에게 어떤 눈치 빠른 학생은 '우리가 놀아주니까 좋지?' 하고 묻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럴 때 그는 솔직하게 '예 그렇습니다. 고맙습니다.'라고 답하곤 했다고 한다.
비록 현재는 제 아무리 '남원시 공식지정 변사또'인 그도 목구멍이 포도청인 지라, 사회적기업에 소속되어 매달 최저임금 이하의 월급을 받으며 어렵게 생활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자신의 노래 제목처럼 박승래만이 할 수 있는 모노드라마로 멋진 무대에서 소리선생이 아닌 배우로서, 광대로서 관객과 만날 '꿈'을 꾸고 있다.
그의 타고난 끼, 꼭꼭 눌러둔 광대의 끼가 녹슬지 않도록 한 겨울 내내 시골마을 경로당을 돌며 원 없이 끼를 발산할 수 있었을 테니 그의 겨우살이는 춥고 배고팠을지라도 그 누구보다 행복했을 것이다.
천성이 낙천적이라 어떤 어려운 형편에 처해도 함부로 비관하지 않으며 '꿈'꾸기를 포기하지 않는 그도 한 때는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며 정신과 치료를 받는 등 심각한 상태였던 적도 있었다고 한다. 사진 속 그가 쓴 두건에 숨은 비밀을 살짝 밝히자면, 그는 머리칼을 하나도 남김없이 밀어버린 민머리이다. 자꾸만 줄어드는 머리칼을 아예 죄 밀어버리고 온 날은 거울을 보다가 이왕 이렇게 된 거 절에 들어가 중노릇이나 할까, 하는 생각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가난하고 이름 없는 연극배우. 점점 자기보다 더 키가 커버릴 듯 자라는 두 아들을 둔 가장으로서 그에게 현실이란 늘 척박하게만 다가왔을 것이라 짐작한다.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지만 그가 아주 어려울 땐 주변의 관심과 도움이 큰 힘이 되어 주었다고 한다. 양심 바르고 진실한 그이니 만큼 음으로 양으로 그를 돕는 이들도 꽤 있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다 자기에겐 '하느님'이라고 했다. 경로당에서 겨우내 만난 수 백명의 노인들을 포함하여.
그의 우울증이 언제 어떻게 떨어져 나갔는지는 물을 기회가 없었다. 현재의 그를 보면 지독한 우울증에 시달렸던 사람같지 않아 보이기 때문에 '믿을 수 없어서'이다.
사람들의 도움 덕으로 살아왔다고 믿는 그는 늘 받기만 하는 쪽이었다가 최근 수 년 전부터 자기가 가진 것을 나누는 삶에 길들여지게 되었다고 한다. 생각해 보니 자기가 가진 재능을 필요한 사람들과 나눌 수 있다는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지난 해부터 자기가 사는 휴먼시아 아파트 관리 사무실 소장님의 전폭 지지에 힘 입어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는 저소득층 이웃들을 위해 일주일에 두 번, 시간을 쪼개 기타를 가르쳐 주고 있다. 돈 한 푼 안 받고서 말이다. 받은 것이라곤 지난 설, 아파트 관리소장님으로부터 설 선물로 받은 사과 한 상자가 전부라고 한다.
자신도 어려운 처지이면서 그는 형편껏 남을 돕는 일에도 열심이다. 젊었을 때 나이트클럽에서 함께 일하던 동료를 수 십년 만에 우연히 만나게 되었는데, 시골로 귀농해 살기 위해 건강이 안 좋은 부인을 데리고 남원에 온 그 부부가 살 집을 알아보려 쉬는 날마다 빌린 차에 동료를 태우고는 온 시골 동네마다 '빈집'을 수배해 종일토록 함께 찾아다니기도 하고, 밤 중에 느닷없이 '이삿짐을 날라야겠다'며 연락해 온 한 지인을 위해 급하게 화물차를 빌려 영문도 모른 채 퇴근하자마자 부랴부랴 달려가 '아닌 밤중의 홍두깨' 같은 이사를 도와준 적도 있었다고 한다.
'광대치례', 광대들이 지녀야 할 4가지 자질지리산 또랑광대 박승래씨의 비장의 레퍼토리이기도 하면서 조선
후기 신재효(申在孝: 1812~84)가 지은 단편가사로 '광대가'라는 노래가 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실린 광대가에 대한 설명 일부를 여기에 소개한다.
광대가 |
<앞부분 생략> 둘째 부분에서는 이 광대들이 지녀야 할 4가지 자질, 즉 '광대치례'를 들고 있다. 그것은 광대의 외모·기품과 같은 천생(天生)의 '인물치례'와 함께, 문학적 요소인 '사설치례', 음악적 요소인 창곡 통달의 '득음'(得音), 그리고 연기능력인 '너름새'(발림)이다. 이는 판소리가 단순하게 '들려주는 소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는 소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즉, 판소리가 사설과 창곡뿐 아니라 창자의 인물됨과 연기능력이 함께 어우러져 빚어내는 예술임에 주목하여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이하 생략>
|
그가 언제부터인가 광대가를 즐겨 부른다는 사실을 알고 어느 새 새로운 레퍼토리가 하나 늘었거니, 하고만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광대가는 배우로서, 소리꾼으로서 소망과 다짐을 하도록 만들어주는 그에게는 길고 긴 잠언과도 같은 노래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적어도 기자가 아는 한, 박승래 그는 신재효 선생이 광대가 사설을 통해 이 세상 광대들을 향해 일침을 날리신 바대로 '광대치례'를 거의 갖춘 진짜 광대임이 분명하다. 이번 '노년의 스트레스 예방 및 해소를 위한 경로당 민요강습'에 동행해 취재한 뒤 그러한 믿음이 더욱 강해졌다.
국보급 인간문화재 명창은 아닐지 몰라도 전라북도 지방문화재급 정도는 쳐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대목에 이르러 그가 이 기사를 본다면 아마 부끄럽다며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어할지 모르겠다. 결코 자기를 드러내려 애쓰거나 추호도 남 앞에서 잘 난 체 해 보이지 않는 그의 평상 시 인품으로 비춰봐서 틀림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칭찬을 아끼고 싶지 않다. 무엇보다 이 기사가 그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어주길 바란다.
기사 들머리에서 밝혔듯, 어디까지나 그를 '띄워주기' 위해서, 즉 '미화'시키기 위해서 이 기사를 썼음을 다시 한 번 솔직하게 고백한다. 부족한 글솜씨로 인해 그를 위한 불후의 모노드라마를 써주진 못할 망정, 오마이뉴스 지면을 빌려 이렇게라도 그에게 아낌없는 격려를 해주고 싶었다. 힘을 내라고, 조금만 더 힘을 내보라고 '쥐구멍에도 볕 들 날 있을 거라'고. 수 십년 무명 설움, 생활고를 탈탈 털고 세상 사람에게 인정받는 진정한 광대로 거듭날 때가 가까워오고 있노라고.
긍정을 예언하는 착한 점쟁이처럼 인간미 넘치는 따뜻한 무당의 기분좋은 '공수'처럼 그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선물하고 싶었다. 이 부족한 글솜씨를 가지고서 말이다. 선의를 품은 다소의 과장은 있었을 지언정 경로당에서 보고 들은 사실에 대해 추호도 거짓과 왜곡은 없었음을 밝힌다.
사진으로 전하는 에필로그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