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서에 '나치' 비판한 부부...어떻게 됐을까

[서평] <홀로 맞는 죽음>(상)

등록 2012.05.01 15:17수정 2012.05.02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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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맞는 죽음(상)"(한스 팔라다 저, 염정용 역, 로그아웃 출판사)의 원어 제목은 "누구나 죽을 때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로 해석할 수도 있다. 누구나 죽음을 맞는 순간에 지나온 삶의 의미를 결산하게 된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이 숙명적으로 직면할 이 질문을, '싸울 만한 가치가 있는 일'에 목숨을 거는 것으로 대답하려 했던 이들은 크든 작든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그렇지만 역사적 대의명분이나 애국지사연하는 차원이 아니라, 아이들 장난처럼 유치하지만 처벌은 마찬가지로 엄정한 일에 몸을 던지고 "홀로 죽어간" 이들은 많지 않다. 지난 주 번역 출판된 "홀로 맞는 죽음(상)"은 나치 공포 정치의 전성기에 이런 류의 '소박한' 저항을 행사한 소시민 부부의 실화를 소설의 형식을 빌려 기록하고 있다.


소설 주인공, 크방엘 부부는 나치 체제에 순응하며 공장노동자로서의 삶에만 충실했던 소시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징집된 아들이 전사한 후, 나치 정부가 더 이상 국민의 안녕과 행복을 지켜주는 정부가 아니라고 판단하게 된다. 그들은 나치 체제의 실체를 간파하게 되었다. 히틀러는 위대한 독일 건설이라는 미명하에 국민들을 전장으로 내몰고 국민들을 무력으로 통제하며, 게슈타포의 철통같은 감시로 언론을 통제하고 국민들이 서로 불신하며 감시하도록 만든다.

크방엘 부부는 나치의 실체를 사람들에게 알려야겠다고 마음먹는다. 그들은 나치와 히틀러를 비판하는 엽서를 써서, 일주일에 두 장씩 낯선 장소에 남몰래 두고 온다. 그 엽서는 이 년간 베를린 시내 곳곳에 뿌려진다. 그러나 엽서를 발견한 사람들은 엽서가 곧 폭발할 폭탄인 것처럼, 읽어보지도 않고 수사기관에 맡겨버린다.

히틀러와 나치 체제의 부당함을 고작 손으로 쓴 작은 엽서 몇 통으로 알리려는 크방엘 부부의 거사(?)는 소박하다 못해 아이들 장난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들 스스로도 자신들의 저항이 계란으로 바위치기처럼 유치하고 보잘 것 없음을 알았다. 그러나 그들은 몇몇 사람들만이라도 자기들의 엽서를 읽기를 바랐으며, '싸울 가치가 있는 이 일'에 목숨마저 기꺼이 건다. 그들은 위험이 없다면 저항이 아닐 것이라고 말하고는, 그 일이 주는 위험을 기꺼이 감수한다.

소설은 또한 나치 체제하의 시민들의 생활상을 그려내고 있다. 그러한 공포 시대에 힘없는 독일 국민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모든 국민이 나치정권의 광기어린 범죄행위에 동조하였던 것인가? 저자 팔라다는 독일 국민들 역시 거대한 군영으로 변해버린 그들의 삶의 터전에서 억압당하고 언제 수용소로 끌려갈지 모르는 공포의 시간을 보내야 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직장에서 쫓겨나고 단란했던 가족이 해체되고 사랑하는 남편과 아들들을 전장의 희생물로 바쳐야 했다. 잘못된 정부와 미치광이 지도자를 선택한 결과인 것이다.

크방엘 부부는 자신들의 저항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또한 언젠가는 외로운 죽음의 공포 앞에 서게 될 것이란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싸울 가치가 있는 일'이라는 판단에 주저하지 않고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비록 작은 엽서에 서툰 글씨로 나치의 부당함을 일주일에 두 장씩 쓰는 일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거대한 범죄 집단으로 변해버린 절대 권력에 가난하고 힘없는 소시민이 사력을 다해 맞선 것이다.


"그것은 양측의 싸움이었다. 한편에는 말 한마디 잘못 했다가는 영원히 제거될 수도 있는 가난하고, 비천하고, 보잘것없는 노동자들이 있었다. 다른 한편에는 총통과 당, 그리고 온갖 권력을 휘두르고 영화를 누리는 데다 국민 전체의 4분의 3, 심지어 5분의 4가 지지하는 거대한 조직이 있었다."

나는 이 소설 어딘가에서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를 떠올렸다. 신 새벽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으로, 서툰 백묵글씨를 나무판자에 쓰던 누군가가 떠올랐다. 가난한 노동자로서 나치에 저항했던 함펠 부부처럼, 70년대에 박정희 유신 체제에 맞서 '민주주의여 만세'라 쓴 후 권력에 쫓겨 다녔던 이름 모를 청년들이 떠오른 것이다. 이 소설은 당시와는 다르지만 정신적으로 혼란스러운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도 어떤 삶을 선택하며 살아갈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홀로 맞는 죽음"은 독일에서 나치 체제를 비판한 최초의 작품이다. 공장 노동자인 함펠 부부의 실제 나치저항 활동에 관한 재판 기록을 토대로 창작되었다. 이 작품은 최근 영어로 번역되어 미국과 영국에서 50만 부 이상 팔렸으며, 전 세계 20여개 국어로 번역되었다. 독일에서는 1947년 출판되어 큰 호평을 받았다가, 당시 편집장이 빼고 고친 수십 쪽을 작년에 원본으로 복원해서 재출간했다. 번역자 염정용의 번역은 바로 이 최근판이다.

이 소설은 극중 크방엘 부부가 체포되는 과정을 추리소설 형식을 빌려 전개하고 있으며, 완성도 높은 추리 소설의 교본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나치의 반인류 범죄라는 무거운 역사적 주제를 추리 소설의 형식으로 재미도 잃지 않고 다루어내었다는 평가도 가능하다.

이 글의 원작자인 한스 팔라다는 독일에서는 현대사에 관심과 기여가 많은 문학가들에게 주어지는 "한스 팔라다"상이 제정되어 있을 정도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나치 시대를 몸소 겪었던 작가로, 당대 독일 시민들의 초상을 진정성 있고도 생생하게 기록해나간다.

이 소설은 그밖에도 고위 정치가들의 행태, 게슈타포 내부의 암투, 당 간부들과 나치 친위대의 횡포와 소시민들의 염탐과 밀고와 갈취와 같은 일화들을 소재로, 당시의 시대상을 생생하고도 흥미진진하게 보여주고 있다.

"홀로 맞는 죽음"은 한 마디로, 매우 흥미진진한 장편 소설이다. 그렇지만 생소한 독일어 인명과 지명을 익혀야 하는 수고는 독자들 몫이다. 주의력이 산만한 나 역시 처음 40여 쪽을 읽는 데 거의 반나절이 걸렸다. 그러나 나머지 400여 쪽은 순식간에 독파해버렸다. 핸드폰도 꺼버렸고 끼니도 건너뛰었다.

책을 덮은 후, 삶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압박감에서 오는 갈등과 번뇌와 등장인물들이 선택한 삶과 그 결과 홀로 맞게 되는 비극적인 죽음의 행로들이 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이 소설의 하편이 언제 출판될 것인지 로그아웃 출판사에 문의했더니. 보름만 기다려달란다. 상편의 의미 있는 메시지들과 긴박한 순간들을 그때까지 반추하고 음미하며 기다려야겠다.

홀로 맞는 죽음

한스 팔라다 지음, 염정용 옮김,
로그아웃, 2013


#저항 #독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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