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앙마이시장에서.
윤재훈
참 예쁘죠. 15세 전후나 됐을까요. 다소곳한 자세로 마치 그 자리에 없는듯이 정물처럼 서서 구워내는데, 몇 개 먹다가 너무 조용하여 고개를 들어보면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굽고 있었다.
동남아 국가에서는 많은 청소년들이 이렇게 장사에 좋사한다. 학교가 끝나고 저녁 장사를 돕기도 하고. 많은 식당들에서는 남자 청소년들이 직접 요리를 해서 내는 곳도 많다.
그리고 특히 태국 처녀들은 S-라인Line, 각선미(脚線美)가 참 아름답다. 베트남의 아오자이 입는 그 몸매가 이쁘다고하는데,그에 뒤지지 않는다. 하노이의 <호암끼엔호수>에서 아오자이를 입고 거닐던 여인이나, 자전거 위에서 아오자이 자락을 나풀거리며 사라지던 그 뒷 모습도 잊을 수 없지만.
그리고 두 손을 가지런히 모우고 "싸와디 캅(남자에게)이나 싸와디 카(여자에게)라는 인사를 받으면 기분이 참--- 좋아진다. 끝이 내려가면서 부드러워 정스럽기까지 한다. 나는 그 인사를 받을 때마다 문득 전라도 말의 마지막에 붙이는 "~잉"라는 단어가 생각이 났다.
"잘가 ~잉", "또 와 ~잉"머리에 다라이(?)를 이고 고갯길을 돌아가다 한 번 더돌아보는 어머니의 모습이나, 명절날 내려온 자식들에게 이것 저것 주섬주섬 다 싸주시고는 그래도 부족하신지 대문간에 자식들을 세워놓고 다시 헛간으로 들어가는 어머니의 마음처럼 정이 뚝 뚝, 묻어난다. 남도의 독특한 색감으로 우리 시의 절창을 이루었던 김영랑 님의 "워매 단풍들건데, ~잉"처럼.
나도 그 인사를 배워 만나는 사람마다 먼저 인사를 하면 대번에 분위기가 좋아져 마치 지기(知己)를 만난 것처럼 화기애애해 진다. 가끔씩 다른 나라의 문화를 존중하여 그런 인사라도 한 마디쯤 먼저하고 두 손을 모두는 서양인을 만나면, 내 두 손에 들려있던 바나나라도 다 건네주고 싶다. 정말 아름다운 전통이다. 이런 전통이 세계시장으로 쭉쭉 뻗어 나가 이 초록별의 공기를 환기 시키면 좋겠다.
나는 또한 "니마스떼"라는 네팔의 인사말을 오랫동안 동경해 왔다. 그리고 사진에서 보았던 산악국가 답게 아름다운 풍광과 맑은 공기만를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나 네팔에서 기억에 남은 것은 포카라에 있는 안나푸르나를 찾아가는 고갯길에서 앞차가 내뿜던 시커먼 매연과, 계곡으로 반쯤 머리를 쳐박고 있던 버스다. 그리고 그 매연 때문에 앞이 안보여 속도를 잠깐씩 늦추고 가던 차들도 생각이 나고.
안나푸르나 ABC를 등반하고 내려와 다시 밤중에 카트만두에 도착했을 때 불빛 하나 없는 공터에 버스는 서고 우루루 달려들어 바가지를 씌우려던 택시 기사들과, 그 택시를 타고 캄캄한 골목을 가는 내내 이 차가 제대로 가고 있나 하고 걱정들도 생각난다. 그곳은 마치 세계 폐차의 집산지 같았다.
물론 히말라야의 안나푸르나를 오르는 내내 고산의 아름다운 풍광과 그들의 맑은 눈동자에 도는 고요함이 좋았고, 폐와 호수에 잠긴 산의 전경도 빼어났지만.
또한 한국인에게 6개월 김치찌개 만든는 법을 배웠다고, 고기를 듬뿍 넣고 한국인 보다 더 김치찌개를 맛있께 만들어 네던 네팔 아저씨나 스치듯 만났던 몇 사람의 한국인들, 가난하고 소외받는 네팔의 청소념들은 모아놓고 무료로 가르치고 있던 착하디 착한 <네팔 짱> 게스트하우스의 주인 아저씨, 자기 수입의 일부를 다시 사회로 환원하는그 맑은 정신도 그립다.
네팔 오지에서 그 지역을 위해 봉사하던 원불교 교무님, 그 사원에서 하룻밤 신세지고 공부를 같이했던 기억이나, <파핑>이라고 사원이 많은 작은 마을에서 커다란 컴퓨터 화면을 앞에두고 집필에 열중하고 계시던 스님을 만났던 일이나, 이제는 벌써 다 잊지 못한 생의 추억의 한 페이지들이 돼 버렸지만, 여전히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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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5년여 세계오지 배낭여행을 했으며, 한강 1,300리 도보여행, 섬진강 530리 도보여행 및 한탄강과 폐사지 등을 걸었습니다. 이후 80일 동안 5,830리 자전거 전국일주를 하였습니다.
전주일보 신춘문예을 통해 등단한 시인으로 시를 쓰며, 홍익대학교에서 강의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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