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64세로 별세한 가운데, 3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를 찾은 김원기 전 국회의장과 박지원 전 민주당 원내대표가 조문을 마친 뒤 빈소를 나서고 있다.
유성호
김근태 동지가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위독하다는 소식이 전해진 뒤, 많은 국민들이 환하게 웃는 김근태 동지의 모습을 다시 보고 싶다는 소망으로 그의 쾌유를 기원하며 기도의 촛불을 밝혔지만, 당신은 끝내 회복되지 못하고 우리 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무기력하고 무능하며, '죽을 각오로 싸우는 척'하는 야당의 모습도 찾기 힘든 요즘인 까닭에, 말 그대로 '죽을 각오를 하고' 싸웠고 실제로도 많은 죽음의 고비를 넘기기도 했던 김근태 동지의 빈자리가 유독 크고 쓸쓸하게 느껴집니다.
김근태 동지와 저는 비슷한 시기 비슷한 정치역정을 겪어왔습니다. 대학교련 강화 반대시위와, 위수령반대 시위를 주도하다 저도 1971년 전국에서 유일하게 구속된 학생회장이었고, 같은 해 김근태 동지는 수배를 피해 긴 도피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같은 시기 비슷한 모습으로 학생운동을 같이하였기에, 민주당 생활을 함께하면서 늘 특별한 동지의식 같은 게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김근태 동지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3당 야합 이래 부산에서만 20년 넘는 세월, 지역주의의 벽을 깨보겠다고 부산에서 제가 불가능한 도전을 할 때마다 언제나 내려와 지지연설을 하고 선거운동을 도와주던 한결같은 모습입니다.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열성적으로 그리하셨습니다. 이러한 굳센 지지와 격려가 있었기에 그 어려운 세월을 저와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견뎠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지난해 6·2 부산시장선거 때의 일은 가슴에 아립니다. 김근태 동지는 와병 중에도 불편한 몸을 이끌고 부부동반으로 부산까지 내려와 부산 사직야구장 앞에서 지원연설을 해주었습니다.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눈시울이 시큰합니다. 와병 중에도 민주개혁세력의 부활을 위해 애쓰는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열망, 평생을 관통해온 그의 신념이 우리를 동지로 묶어주고 있었다는 것을 새삼 느낍니다.
한미FTA 반대투쟁의 선각자이자 '멋진 신사' 생각해보면, 그는 늘 있어야 할 곳에는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의 크레인 농성으로 촉발된 한진중공업 사태 때, 그는 역시 불편한 몸을 희망버스에 싣고 부산까지 내려와 희망의 불씨를 지피는 역할을 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는 늘 해야 할 일은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지금 한미FTA 폐기투쟁에 가장 앞장 선 사람으로는 이정희, 정동영 의원 등을 꼽지만, 가장 먼저 한미FTA 반대투쟁을 시작한 사람은 김근태 전 보건복지부 장관과 천정배 전 법무부 장관이었습니다. 그것도 바로 참여정부 그때의 일이었습니다.
저도 지금은 한미FTA 폐기투쟁의 최전선에 있지만, 김근태, 천정배 전 장관에 비하면 한참 늦게 시작한 셈입니다. 제가 정치일선에서 떠나 대한체육회장으로 있던 시절, 김근태 전 장관 등이 가장 먼저 한미FTA를 반대했습니다. 그는 선각자였습니다.
그는 늘 해야 할 말은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재임하던 시절, 재정경제부를 중심으로 국민연금 기금을 주가와 환율방어에 쓰고자 하는 움직임에 대해 그는 이례적으로 장관이 직접 나서 국민연금을 정부의 주머니돈처럼 쓰는 것을 반대하였습니다. 그 유명한 "노무현 대통령과, 계급장 떼고 토론해보자"는 발언도 그때 나왔습니다.
지금 환율방어나 주가 방어에 동원되면서 외국인들로부터 "한국의 현금자동인출기"라는 조롱을 듣고 있는 국민연금 등의 연기금문제를 생각하며 그의 말이 옳았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이런 그가 이제 우리 곁에 없습니다. 일찍이 그는 그를 고문했다가 구속되어 7년형을 살고 있던 이근안을 만나 그를 개인적으로 용서했습니다.
그는 "이근안이 무릎 꿇고 용서를 빌어도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는 것 같지 않아 진심으로는 용서가 안 되더라"며 진심 어린 용서를 하지 못한 것에 대해 마음 아파하던 여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멋진 신사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