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사투리와 경상도 사투리를 질펀하게 쓰는 영화 <황산벌>에서 백제 장군역을 맡은 박중훈(좌)과 신라 장군역을 맡은 정진영(우)
씨네월드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의 일이다. 친척 결혼식 피로연 자리에서 집안 어른 중 한 분이 "그래, 사위는 어디 사람인가?"하고 친정아버지께 물으셨다. 그러자 아버지는 정색을 하시고는 "당연히 우리 사람이지"라고 한 뒤 고집 센 어투를 한층 더하며 "내가 왜 백제 사람을 사위로 삼겠나?"라고 하셨다.
여기서 말하는 '백제 사람'은 전라도 사람을 뜻한다. 역사에서 백제는 충청도와 전라도에 걸쳐 있건만 내 아버지는 '백제=전라도', '신라=경상도'란 단순 구분법에 기초해 가끔 '백제 사람', '신라 사람'이란 말을 하시곤 했다.
도대체 어디에 살기에 그러느냐고? 내 윗대 할아버지가 터를 잡은 이래 줄곧 우리 집안은 경상남도 거창군 덕유산 자락에 살아왔다. 나 역시 거창에서 나서 고등학교까지 이곳에서 학교를 다녔다.
우리집이 있는 마을은 해발고도만도 680m에 달한다. 강줄기가 시작되는 첫 마을이며 겹겹이 산으로 둘러싸여 대처로 나가는 길이 있을까 싶은 곳이다. 다 자라 생각해 보니 어찌 그리 좁은 곳에 자리 잡고 사셨을까 싶다. '신라 사람'이라는 내 남편은 대구 사람이다(대구라 하지만 태어난 후 어린 시절을 잠깐 보낸 뒤 서울로 왔으니 '유사품'이라고나 할까).
아버지는 왜 '백제 사람을 사위로 맞겠느냐'고 할 정도로 호남 사람을 싫어하게 되셨을까? 집안 어른들에게 들은 말에 따르면, 평소 너무도 싹싹하게 잘 대해 주던 전라도 출신 사람이 이집 저집에서 돈을 꾸고는 하루아침에 집을 버려두고 도망을 쳤는데 아버지도 피해 당사자였으며 이 일은 가난한 시골의 삶을 더욱 팍팍하게 했다는 것이다.
신기한 건 대구 분인 내 시아버지에게서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시아버지 역시 평소 잘 대해 주던 전라도 사람에게 사기를 당한 적이 있다는 말을 하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사기꾼에 전라도 사람만 있는 건 아닐 텐데 유독 '전라도 사기꾼' 이야기가 많았다. 이런 비교가 맞을지 모르겠지만 교사가 잘못한 일이 알려졌을 때 그 교사가 전교조 교사라면 언론이 대서특필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가 아닌가 싶다.
빨치산이 드셌던 곳, 그런데 그 빨치산이...아버지가 전라도를 싫어하는 또다른 이유는 뜻밖에도 '빨치산'과 관련이 있다. 한국전쟁 전후로 우리 마을이 있는 덕유산 자락에는 빨치산이 자주 출몰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잘 아시는 분이 빨치산에게 죽임을 당하셨다.
생전 아버지가 이 일에 대해 말하기를 꺼려하셨기에 자세한 사정은 잘 모른다. 다만 지나가는 말로 하시기를 빨치산들이 아버지가 잘 아는 분을 다른 세 사람과 함께 구덩이를 파라하고 돌팔매질로 죽이고는 대충 묻었는데 그 빨치산 중에 안면이 있는 전라도 사람이 있었고 그 사람이 주동했다는 것이다.
난리 와중에 나온 말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당시에는 그럴 사정이 있었는지 아버지를 비롯한 집안 어른들은 '전라도 사람이 주동해 사람을 죽였다'고 믿었다.
좌우익 대립이 빚어낸 비극의 땅 '거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