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기연(좌)씨와 원영순씨 모녀. 그들의 개인사는 사할린 한인사를 넘어 우리가 역사를 대하는 태도에 대한 가슴 저며지는 고발이었다.
권기봉
8월 중순인데도 유즈노 사할린스크 제1공동묘지에는 벌써 스산한 바람이 분다. 임박한 겨울을 대비하기 위함인지 묘지에 서식하는 까마귀 떼조차 성묘객이 두고간 제물을 하나라도 더 차지하려는 듯 가쁜 비행을 거듭한다.
그러나 그들의 법석과는 달리 남편이자 아버지인 고 원수원씨의 묘를 찾은 두 여인은 보드카 한 병과 방울 토마토 3알, 그리고 세 개의 초콜릿을 놓고 조용히 절을 올릴 뿐이다. 남편을 먼저 떠나 보낸 올해 76세의 원기연씨는 인천시 남동구 논현동에서, 큰딸 원영순씨는 러시아의 서쪽 끝 상트 페테르부르그에서 날아왔다. 유즈노 사할린스크는 그들이 서로의 시공간으로 흩어지기 전 살던 곳이다.
"저는 2007년 10월 초이렛날 한국으로 영주귀국을 했어요. 그 뒤로 2년에 한 번 정도 이렇게 자식들하고 남편 묘를 찾아요. 자식으로는 같이 온 의학박사인 큰딸과 그 아래로 서이가 있어요. 애들이 아버지는 없었지만 공부는 참 열심히 했지요."유즈노 사할린스크 남쪽에 있는 제1공동묘지를 주변을 지나다 우연히 만난 원기연씨 모녀.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그녀의 개인사를 넘어 사할린 한인의 역사와 나아가 우리가 역사를 바라보는 태도에 대해 깊은 성찰을 촉구하는, 가슴 저린 고발이었다.
"꿈에 그리던 영주귀국... 그러나"원기연씨는 일본 정부의 자금 지원(2010년 7월 현재 700여억 원)으로 2000년 2월부터 시작한 '사할린 한인 영주귀국 사업'을 통해 인천에 자리를 잡았다. 다만 자녀들과 함께 온 것이 아니라, 서로 남남이던 다른 여성과 함께 영주귀국을 해야만 했다. 규정상 '2인1조' 여야 신청이 가능해, 원씨처럼 배우자를 먼저 떠나 보냈거나 이혼을 했거나 애초부터 독신이었던 이들도 여하튼 다른 사람과 짝을 이뤄야만 신청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살 날이 더 적은 이들이지만 이렇게 대학교 기숙사처럼 2인 1조로 무작정 짝을 지어야 그나마 영주귀국 할 수 있도록, '고국'은 규정하고 있다. 그마저도 '1세'나 '1세와 함께 사할린으로 넘어왔거나 해방 전 태어난 2세'만 영주귀국을 할 수 있기에 원기영씨의 딸 영순씨와 같은 3세에게는 신청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어쩌면 고국에 의해 '신(新) 이산가족'이 양산되고 있는 셈이다.
그나마 영주귀국을 했다고 해도 그 삶은 한겨울 사할린의 풍설(風雪)만큼이나 강퍅하기 그지 없다. 영주귀국자의 거개가 노년층이기에 국민기초생활보장 수급자로 지정되어 1인당 매달 약 34만 원의 보조금을 받기는 하나, 주택임대료에 각종 공과금, 그리고 생활비를 제하면 수중에 남는 돈이 거의 없다. 지난 2008년 1월 노령연금법이 개정되면서부터는 8만4천 원 정도의 연금마저 끊긴 실정이다. 그렇다고 아르바이트를 할 수도 없다. 한푼이라도 벌이가 생기면 그때부터 국민기초생활보장 대상자에서 제외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인가. 누군가는 이를 두고 '2인 1실짜리 반(半)수용소 생활'이라고 자조하기도 한다.
원기연씨가 이처럼 '국민이되 비(非)국민' 같은 처지가 된 연유를 알고자 한다면 그 자신의 역사, 그리고 우리의 역사가 한층 비극적이던 지난 194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41년 가을인지 42년 봄인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여하튼 그때 우리 가족은 경남 통영에 살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갑자기 삭쬬르스크로 징용돼 간 거예요. 아버지가 징용된 이듬해 어머니와 저, 그리고 동생 둘도 삭쬬르스크로 왔고요."일제 때 '토로(塔路)'라 불렸던 삭쬬르스크는 사할린 섬의 중서부에 있는 도시로, 일본이 지배하던 시절에는 조선인을 강제동원해 석탄을 채굴하던 곳으로 악명이 높았던 곳이다. 일제는 당시 "모집" 혹은 "관(官) 알선"이라는 이른바 '자원' 형태를 취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조선의 경제 구조는 일제에 의해 왜곡된 상태였기에 밥벌이를 위한 선택지가 없었고, 설령 모집에 '자원'해 사할린에 왔다고 하더라도 조선인은 일신의 자유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폭압적인 노동 착취를 당해야 했다. 그렇기에 원씨의 말마따나 이곳 조선인들의 삶이란 '노예 생활'에 다름 아니었다.
"아버지 없이 산 68년... 조국은 어디에"특히 원씨의 아버지는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4년 8월, 사할린에서 일본 본토의 정반대편에 있는 큐슈로 다시 징용되고 만다. 미군 잠수함에 의해 사할린과 홋카이도 간 물류가 힘들어져 고안해낸 이른바 '이중징용'이다. 그런데 그 아버지는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1945년 초, 사망했다는 소식만 전해졌을 뿐이다.
아버지 없이 살아야 했던 지난 68년. 원기연씨는 최근 아버지를 찾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돌아간 아버지를 되살릴 수는 없는 일. 자신이 그의 딸임을, 나아가 아버지나 자신이나 강제동원의 피해자임을 증명하는 것이 그의 목표다. 그가 할 수 있는 '아버지를 위한 작지만 의미있는 명예회복'이다. 그러나 한국 현실에서, 그마저도 쉬운 일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