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달문시장을 만든 정조와 행차장면
멋진세상
수원화성행궁 축조와 상업도시로의 구상은 노론정권에 좌지우지되는 조선의 정치판에서 정조가 꿈꾸는 개혁의 발판작업과도 같은 것이었다. 일단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에 이장한 정조는 방위와 교통을 염두에 두고 몇 년에 걸쳐 수원화성 축조작업을 진척시켰다. 그리고 사회기반시설을 하나씩 갖추어 나갔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수원에는 부족한 것이 있었다. 수원(水原)이라는 이름과 달리 수원에는 물이 부족했다. 어찌할 것인가. 문제가 있으면 해결책도 있는 법. 정조는 제방을 쌓고 버드나무를 심게 했다. 버드나무는 물이 많고, 튼튼한 뿌리로 제방을 잡아 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수원천을 시작으로 수원에 흐르는 크고 작은 개천들을 서로 잇고 이어 인공 저수지를 만들었다.
"히야! 우리 수원에 이렇게 물이 많았어?" 놀란 건 수원사람들이었다. 이후 버드나무가 무성해지면서 수원사람들은 이 개천을 '버드내'라 불렀다. 버드나무를 심은 덕에 물길이 성해지고 농업이 일어났다. 수원에 종종 능행차를 했던 정조는 수원을 일컬어 유경(柳京)이라 칭하기도 했다.
유경(柳京)은 한자 그대로 하면 '버드나무가 많은 서울'이라는 뜻이다. 사도세자의 묘가 자리한 수원에 화성행궁을 짓고 '유경'이라고 부르는 정조의 의중은 분명했다. 왕다운 왕이 되어 수원을 한양에 버금가는 도시로 키우고, 이를 기반으로 개혁을 이루겠다는 포부에 다름 아니었다.
유경, 수원팔달문시장에서 만난 유상들 수원천변에 성을 축조하고, 버드나무를 심고, 사회기반시설을 갖춘 뒤 정조는 화성행궁의 남문인 팔달문에 시장을 열었다. 그것이 오늘날 수원의 팔달문시장이다. 그러니까 수원 팔달문시장은 실로 '왕이 만든 시장'이었다.
시장을 연 정조는 전국의 대상인들을 불러 모았다. 정조의 부름에 응해 전국의 내로라하는 상인들이 팔달문시장으로 속속 모여들었다. 이들은 정조처럼 부국강병의 근본이 상공업에 있다고 보고 일찍이 상업에 투신한 선비상인들이었다. 그 중 대표적인 상인이 선비집안으로 일찌감치 무역과 상업에 눈을 떴던 윤선도의 후손들이었다.
이처럼 뿌리가 선비에 있다 보니 수원상계는 이(利)보다는 의(義)를 따르고,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중시하는 기풍이 조성되었다. 일제강점기에 교육 사업에 헌신한 상인들이 특히 많았던 사실도 이와 무관치 않다.
"유상이 뭐가 다르냐고요? 유상은 효(孝)를 바탕으로 상도(商道)를 실천하는 상인이지요." <왕이 만든 시장> 2부에 실린 상인들의 이야기를 관통하며 흐르는 것은 유상으로서의 덕목이다. 곧 효를 바탕으로 한 상도의 실천내력이다.
상인을 상인답게 하는 덕목은 상도일 터. 유상에게 있어 상도를 관통하는 가치는 효라는 것을 팔달문시장 상인들은 그들의 생활상을 통해 말해준다. 유상은 효를 실천하는 상인이었다. 상인의 효는 선비의 효와 다르지 않았다. 다르지 않지만 실천방법에 있어서는 차이가 났다. 조상을 극진히 모시고 효를 조행의 기본으로 삼으며 성현의 가르침에 따라 행동하는 게 선비의 효라면, 유상은 효로써 상인의 도를 실천한다. 곧 상도(商道)가 유상에겐 효만큼 중요한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국제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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