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의 <압구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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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경의 발달과 금속기의 사용은 생산력 증가를 가져왔고, 부와 권력을 가진 계층이 등장해 정치조직을 형성했다. 한강 유역은 고대의 백제·고구려·신라 삼국이 국력을 키워 영토를 확장시키면서 필연적으로 만나게 됐던 역사의 장이다. 또한 한강은 고려와 조선의 중요한 교역로로 활용되기도 했다.
이런 한강의 오랜 역사와 문화는 조선의 화가들을 통해 우리에게 남겨졌다. 조선 초부터 한강의 경치는 팔경에 포함될 정도로 명승지 중 하나로 거론됐고, 많은 정자와 루가 입지해 있었다. <세조실록>에 따르면, 임금의 종친, 문무재상, 승지들이 참여한 연회에서 활쏘기를 했는데 좋은 점수를 딴 권람에게 <한강도> 한 폭을 주기도 했다.
한강 그림을 많이 그린 것은 겸재 정선이다. 한강은 서호, 동호, 남호로 구별할 수 있는데 서호(양천방면) 일대를 그린 겸재의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 4점이 남아있다. <경교명승첩>은 겸재가 60대 후반인 1740년 12월, 양천 현령에 부임한 후 친구 이병연과 시와 그림을 서로 바꿔보기로 약속하면서 다음해 여름까지 한강변의 명소, 백악산 일대, 고사, 자화상, 거처 등을 그린 화첩이다. 이중 남아있는 것은 <금성평사도>(金城平沙圖), <양화환도도>(楊花喚渡圖), <종해청조도>(宗海聽潮圖), <소악후월도>(小岳候月圖) 등 4점이다.
화첩에 포함된 4점 외에도 <관악석남도>(冠岳夕嵐圖), <관악청남도>(冠岳晴嵐圖)가 있다. 또 한강 전경을 그린 <목멱조돈도>(木覓朝暾圖), <안현석봉도>(鞍峴夕烽圖), 화면 중앙에 주요 경물을 부각시킨 <공암층탑도>(孔岩層塔圖), <소요정도>(逍遙亭圖), <양화진도>(楊花津圖), <선유봉도>(仙遊峯圖), 양화진 일대 겨울 경치를 그린 <양화답설도>(楊花踏雪圖) 등도 모두 정선의 그림이다.
동호 일대를 그린 한강도로는 압구정에서 바라보는 동호의 경치를 그린 <압구정도>가 있다. 남호 일대(서빙고에서 용산)는 본래 용산강을 일컫는데, 너벌섬(지금의 여의도)과 밤섬을 볼 수 있다. 남호일대를 그린 그림 중 정선의 그림은 <동작진도 銅雀津圖>가 있다.
카페촌에 밀려난 미사리 유적지, 서울시 홍보관으로 전락한 몽촌토성한강은 강변에 비옥한 농토를 주었다. 홍수 때마다 토양이 밀려와 강변에 비옥한 충적지를 발달시켜 선사시대부터 농경 및 취락 터가 형성됐다. 또한 한강변에서 일찍이 어로생활을 했음을 알려주는 많은 유물들도 발견되고 있다.
그러나 한강은 일제의 근대화라는 미명하에 공공재에서 사유재로 급변하게 됐고,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민중들은 한강을 떠나기 시작했다. 해방 이후 개발세력들 역시 한강을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는 데 이용했다.
면목동 구석기 유적은 서울의 한강 유역에서 발굴 조사된 유일한 구석기 유적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정밀조사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주택 건설 등 도시개발을 진행해 현재는 그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