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춘숙 대표
희망과대안
"여성문제를 아주 사소한 문제로 치부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일이에요. 전체 사회에서 여성문제는 아주 작은 문제이고,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는 거죠. 여성문제보다 중요한 일들이 훨씬 더 많다는 생각…… 당하는 여성의 입장에서는 당장의 생존 문제, 즉 죽고 사는 문제인데도 말이에요."
정춘숙 (사)한국여성의전화 상임대표는 지난 3월 24일 발족한 2010유권자희망연대(이하 유권자연대)의 창립총회에서 '밥(무상급식)과 강(4대강)'만이 아니라 여성의 '안전'문제를 주요활동의제로 채택해줄 것을 요청했다.
누군가 '일(비정규직, 실업, 일자리 등)'의 문제를 유권자연대의 주요의제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요구했고, 이에 대해 사회자가 다음번 운영위원회에서 검토해보겠다고 답변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성문제도 당연히 유권자연대의 주요의제에 포함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얼마 전 전 국민을 공분케 했던 '부산 여중생 납치 살해 사건'만 둘러보아도 일상생활 속에서의 여성의 '안전'문제는 매우 심각한 일임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권자연대에서는 '밥'과 '강'에 이어 '일'의 문제가 주요활동의제로 채택되었음에도, 그가 제기한 여성의 '안전'문제는 주요의제로 포함되지 않았다. '일'의 문제와 달리 여성의 '안전'문제를 의제화 하기에는 약간 어려운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일리 있는 말이다. 그 역시 이성적으로는 당연히 수긍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왠지 좀 섭섭했다. 6월 지방선거를 맞아 시급하게 제기되고 있는 '밥'과 '강', 그리고 '일' 등의 의제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것이, 어쩌면 지극히 당연하고도 또한 올바른 판단일 테지만, 혹여나 여성의 문제가 이렇듯 언제나 홀대받아온 것은 아닌가 하는 그의 자괴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근민과 김민석 얼마 전 그를 매우 황망하게 만들었던 '우근민 사태'만 해도 그렇다. '가치'와 '정책'에 기반한 야권의 선거연합을 이루겠다고 나선 민주당에서 성희롱 전력이 있는 우근민 전 제주지사(그는 이 사건으로 대법원에서 확정 판결을 받았다)를 영입해 공천까지 강행하려는 구태를 보였던 것이다.
다행히 한국여성단체연합을 중심으로 한 시민사회단체의 강력한 반발(정춘숙 대표는 시민사회단체의 대표단의 일원으로 민주당을 항의방문해 정세균 대표를 면담하고 온 바 있다)로 우근민 전 지사의 공천은 하루아침에 '도루묵'이 되고 말았지만, 그 과정에서 우근민 지사와 함께 이름을 빛낸 인물이 하나 있었으니, 그는 바로 다름 아닌 정춘숙 대표와 같은 해(1982년)에 대학에 입학하여 서울대 총학생회장까지 지냈던, 학생운동 출신의 김민석 민주당 최고위원이었던 것이다.
김민석 최고위원은 지난 2월26일 제주도까지 직접 날아가 우근민 전 지사의 '복당'을 공식 요청한데 이어, 지난 3월8일에는 시민사회단체 등의 문제제기를 '사실관계에 대한 정확하지 못한 이해'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언급해 많은 이들의 입을 '쩌억' 벌어지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그랬던 그가 이번에는 (아무런 사과의 말도 없이 오히려) '희망과대안' 등에서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야권의 선거연합을 위한 4+4 단위의 민주당 측 협상대표로 버젓이 활동하고 있지 않은가?
정춘숙 대표는 매우 착잡해 했다. 우근민 전 지사를 영입하려 했던 당사자가 하필이면 자신과 같은 해에 학생운동을 시작한 김민석 최고위원이라는 사실 때문인지 그는 불현듯 한 마디를 더 덧붙였다.
"운동권 역시 여성문제를 대하는 태도에서는 별다를 바가 없어요."여성문제를 홀대한 1980년대그가 대학에 입학한 1982년은 엄혹한 시대였다. 어렸을 적 '소망'대로 그저 소설가가 되고 싶어 단국대 국문과에 진학했던 문학도로서, 그가 처음 사회과학 공부를 시작했던 이유는 단지 '소설을 잘 쓰고 싶어서'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시대는 그를 문학도로만 잡아두지 않았다. 1980년 5월의 광주이후 아직 세상은 '광주의 광자'도 언급할 수 없을 만큼 매우 엄중했지만, 그럴수록 세상을 바꾸어내고자 하는 열망은 더욱 커져만 가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는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1986년 2월 대학졸업과 함께 그 유명한 '서노련'의 일원으로 노동현장 속으로 투신해 들어갔다. 1986년 7월 구로지역에 있는 '오트론'에 입사하여 1988년 3월에는 꿈에 그리던 노동조합을 만들어냈지만 곧바로 해고당하고 말았다.
"태어나서 그렇게 많이 맞아본 적은 처음"이라고 그는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구속되어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나온 그는 다시 노동현장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경찰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던 그는 그의 '꿈'이었던 노동현장 속으로 다시 돌아갈 수가 없었다. 취업하고 나면 바로 해고되는 것을 4, 5차례 반복한 끝에 그는 결국 현장 취업을 포기하고 만다. 대신 그가 취업했던 곳은 당시 기아자동차 협력업체의 노조위원장들로 구성되어 있던 안산자동차노동자협의회였다. 그는 이곳에서 간사로 1991년 9월까지 일을 했다.
"이상하게 기구운동(총학생회, 민노총 등 연합기구)을 하기는 싫었어요. 학교 다닐 때부터 이론투쟁은 아주 싫어했는데, 그것에 질려 버렸는지 머릿속에는 온통 현장에 대한 생각뿐이었어요."그 역시 당시에는 여성문제를 사회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자연스레 해소되는 문제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했다. 자신이 '여성'임에도, 그래서 막연하게나마 언젠가는 '여성운동'을 해야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음에도, 그는 사회의 최전선에서 우리 사회의 큰 모순부터 우선 해결하기로 마음을 먹고 있었던 것이다.
남성중심의 조직, 그리고 '여성의전화'그러나 그에게도 고민은 많았다. 여성인 그가 몸담았던 노동운동은 남성중심의 조직문화가 고착되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여성으로서 '여성에 대한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시작될 수밖에 없었다. 세상이 바뀌면 여성문제도 자동적으로 해결될 것이라는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과거의 전력 때문에 현장에서 자꾸 해고되는 것도 그의 고민을 깊게 만들었다. '평생 무슨 일을 하고 살까?'하는 근본적인 고민이 시작된 것이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로 시작된 동구 사회주의 국가의 몰락은 그에게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많은 고민과 고통 속에서 불현듯 '도대체 여자가 뭔지 알고 싶다'는 생각이 싹터 오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여성노동자회에서 일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무슨 일인지 3일 동안이나 전화를 받지 않는 거예요."그러던 중 함께 소모임(소설반)을 하던 친구로부터 '여성의전화'에서 활동가를 뽑는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노동운동을 해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뭐, 한 번 해보지'하는 생각이 솟아나기도 했다고 한다.
"상담파트와 홍보파트 중 상담파트를 선택했어요. 현장의 경험을 중요시하고 있었으니까요."1992년 6월, 그렇게 아무 것도 모르고 시작한 '여성의전화'에서 그는 지금까지 꼬박 19년을 일해오고 있다. 그리고 2009년 2월부터는 상임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다른 방식, 다른 활동"처음 1년 동안은 적응이 안 돼 갈등이 많았어요. 6개월 동안은 아주 심했고요."무엇보다 노동운동과는 다르게 뚜렷한 조직대상이 없다는 게 가장 힘들었다고 한다.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그들을 의식화하고 그래서 노조를 만들거나, 운영하는 방식과 달리 '여성의전화'에서는 참고, 또 참다가 끝내 참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러, 그것도 몇 번의 망설임 끝에 겨우겨우 전화를 걸어온 '벼랑 끝'에 올라선 1인의 여성과 통화를 해야만 했다.
1992년 대선을 앞두고 '지금 뭐 하고 있냐?'는 옛 동료들의 힐난도 그를 힘들게 만들었다고 한다. (일할) 자리를 만들어 놓았으니 다시 (노동운동진영으로) 돌아오라는 강권도 많이 받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수많은 갈등 속에서도 '여성의전화'에 꿋꿋하게 남아 있었다.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대상화할 때 분노를 많이 했어요. 사람을 살리자면서, (사람을 죽이는) 그런 세상을 바꾸자면서, 어떻게 그 사람들을 대상화할 수 있는지, 분노할 수밖에 없었어요."노동운동은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활동이었다. 물론 여성운동도 여성들을 대상으로 활동하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그는 노동운동을 하면서 이런 고민 때문에 도대체 운동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근본적인 고민에 빠져들게 되었다고 한다. (대상화된) 사람들의 주체성을 무시하면서 그들을 위해 세상을 바꾼다는 운동을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오랜 세월 '여성의전화'에 몸담아오면서 그는 미흡하나마 해답의 단초를 얻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