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무주 적상산사고
미래영상
"엄마, 나 피아노 싫어. 가야금 배울래"7살 때부터 전주에서 자란 미래영상 김석란 대표는 어렸을 때부터 유별난 구석이 있었다. 그 나이 때 어린 여자 아이라면 으레 한번쯤은 다니는 피아노 학원을 마다하고 가야금을 배우고 싶다고 부모님을 졸라댔던 것. 우리 옛 문화가 고스란히 살아 있는 전주 지역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오래 전부터 그녀의 머리 속에 자리 잡은 궁금증 때문이었다.
"어느 날 음악 수업을 듣는데, 책을 자세히 살펴보니 모두 서양음악뿐이더라고요. 왜 우리가 국악은 배우지 않고 양악만 배워야 되는지 이상했어요. 저는 당연히 우리 것을 먼저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남들 다 배우는 피아노 대신 가야금을 배우겠다고 한 거예요. 그때 민요하고 산조 가락까지 배웠던 것 같아요."우리의 것을 스스로 비하하는 서양 우월 교육은 비단 음악 시간에만 국한되지는 않았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로 이어진 제도권 교육에서 은연중에 강요되는 '서양 것은 좋고, 우리 것은 좀 떨어진 것'이란 메시지는 끊이지 않고 계속됐다. 어린 마음이었지만, 그러한 현실이 내심 못마땅했다. 그러다 들어간 대학에서 그녀는 한지(韓紙)와의 첫 인연을 맺는다.
김 대표는 대학에서 학보사 기자 생활을 했다. 많은 기사를 썼지만 그 중에서 1년 이상 연재를 했던 '부채와 한지 장인(匠人)'에 대한 기획 기사가 기억에 남는다. 우리의 종이를 만드는 장인들을 취재하면서 한지에 대한 매력에 푹 빠졌던 것. 하지만 한지에 대한 역사적 자료는 턱없이 부족했다. 한지의 발상지로 알려진 전주에서도 그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한지와의 두 번째 인연은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와서다.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했던 그녀는 대학 졸업 후 10년 가까이 전문 사진작가로 활동했다. 어렸을 때부터 우리 문화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전통 무용 등 우리 춤에 대한 사진 작업을 주로 했다. 이를 위해 전주에 작은 스튜디오도 차리는 등 사진 작업에 열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작품 구상을 하는 중 '우리 춤을 우리 종이인 한지에 담아 보면 어떨까?'란 생각이 들었다. 한지는 보존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그 고유의 질감이 우리 춤의 느낌을 더 잘 살려줄 수 있으리란 느낌에서다. 눈으로만 보는 사진이 아니라, 촉감으로 느낄 수 있는 사진이 눈 앞에 어른거렸다. 마음 속에만 담아두기에는 아까웠다.
"사진하고 관련된 모든 재료는 수입품이에요. 사진의 기본적인 기능과 특성은 기록, 보존, 재현에 있어요. 즉 보존과 재현을 얼마나 잘할 수 있느냐가 중요한데, 이러한 특성에서 그 어떤 종이보다도 한지가 최고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한지로 사진을 인화할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죠. 96년 10월에 이 사진들을 가지고 사진전을 열었어요."실험적인 사진전이었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좋았다. 처음이라 시행착오는 있었지만, 한지에 담긴 우리 춤의 역동적이면서도 단아한 자태는 제 자리를 찾은 것처럼 보였다.
사진작가에서 한지 사업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