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지석가산
정선영
정석(丁石)으로 각인한 아픔을 쪼아내, 손등은 피 흘리고, 고통을 다스리고자 재차 정에 혼을 쏟아 부어 보니, 어느덧 산중엔 대나무처럼 가득한 고집뿐이다. 내가 무엇을 위해 이 허무한 고통을 참고 있을까 하여 뒤돌아보니 산중엔 호랑이 가득하여, 그보다 더 무서운 아전들의 횡포에 신음하는 백성들뿐이었네.
찻잔의 고요함은 노동의 시 한 구절처럼 평생의 불평스러운 일들을 모두 털구멍으로 흩어져 나가게 하였다네. 시가 무엇이요, 아집이 무엇인가. 다 내려놓고 다 부질없는 것은 시장 바닥에 허허로운 햇살 한줌보다 가치 없는 욕망이라네.
세상을 바꾸어보리라 했던 노장의 죽음은 부엉이 바위에서 세상사는 바른 이치를 절규하듯 메아리치며 생을 마감할 때, 그 반대편에서는 부질없는 욕망의 꿈 타래를 붙들고 비웃듯 진실을 갖은 방법으로 비틀어댔지만 그 언젠가는 비열함의 그 끝에서 남도 북도 아닌, 핵무기도 개성공단도 아닌, 그저 주검의 싸늘한 작은 비석일 따름이네.
다산에 서면 추사의 찬연한 글씨와 초의의 작은 소중함을 알게 해준 찻잔과 아암의 주역 한 장이 나붓기네. 다산의 통로에 들어서면 어디가든 만나면 길이요. 어디선가 마주보면 본 듯한 그늘과 소슬소슬 불어대는 나무잎사귀, 그래서 우리는 "본듯함"과 "만난 것" 같은 것과 또 다른 인연을 맺으니, 그게 동암에서 써내려갔던 다산의 519권 찬란한 학문보다 나은 이치일지도 모른다.
다조에 앉아서 시름하듯 들려오는 물소리를 들어보니, 그것 역시 무상함의 소통이요. 회화처럼 그려지는 인생의 회한뿐이다. 늙어 이곳에 와보리니, 아 시대의 저주처럼 들리는 광장의 불임의 기간들, 언젠가는 막말하고 죽어간 이로 기억되는 서울 시청 앞 마이크 소리에서 흘러나온 궤변이 통곡을 하리라.
대통령이 아닌 한 개인의 세상 등짐에도 우리는 아픔을 전하거늘, 이 시대의 소통을 위해 마지막으로 택한 그 거룩한 길에 고통을 어찌 통분으로 여기지 못하고 연지석가산의 대통을 들고 후려치는 듯한 노망을 들어야 할까. 삽 한 자루 쥐어줘 스스로 무덤을 파게 하리니, 그게 가슴을 쓸어내리는 진창에 갈갈이 찢겨진 철학이 우르르 쏟아지는 것 같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