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꽃양>
임유철
나를 포함하여 이른바 근대적 학문의 세례를 받은 아카데미의 비평가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하위주체'는 말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오기는 했었다. 가령 그런 질문의 연장선상에서, <밥․꽃․양>과 같은 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나 이주노동자․홈리스․철거민․동성애자 등과 같은, 체제로부터 배제되고 억압당해온 주체들의 문학적 재현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에 대한 매우 고급한 담론적 고민을 펼쳐 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 담론 바깥의 현실에 대해서는 매우 무지했다는 점은 역시 처절하게 반성될 필요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쨌든 이 담론적 물음들은 어떻게 그들을 내레이터 또는 작가의 연민(sympathy)적 시선에 갇히게 하지 않고, 그것을 인간적 존엄의 경지로 끌어올릴 것인가 하는 물음을 낳았다. 사실 공감(empathy)적 시선을 가장 높은 수준에서 형상화하고, 이를 통해 이들이 속해 있는 장소의 폭력성을 고발․비판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은 분명하다.
소설에서도 그러한 어려움은 수시로 발생하지만, 그것이 르포의 형태를 띤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하위주체'는 말하되, 자신이 속해 있는 상황을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현실의 전체화된 조직적 질서 속에 용해시켜 말하기보다는, 고립된 상황이 촉발시키는 고통의 생생한 확대와 충격에 대한 고백을 통해 때로는 진실을 말하고, 때로는 그것을 자기 식대로 확대하거나 과장하기도 하며, 어떤 경우에는 편의적으로 그것을 은폐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문단의 외면 대상, 르포작가의 글쓰기반면 기록자(르포작가)는 만일 그가 상황에 대한 엄정한 객관주의적 태도로 이들 취재원인 하위주체들의 발언을 일정한 원칙 속에서 '여과'하는 과정을 통해 사실을 확정하고 진실을 길어내고자 한다면, 르포의 원재료가 되는 이들의 발언을 일정한 수준에서 취사선택하고, 그것을 더 큰 사회적 연관 속에 배치하면서, 르포를 쓰고 있는 자신의 세계관을 적극적으로 주입하는 일에 더욱 민감하게 주의하면서 글쓰기를 진행할 것이다.
문학적 행동주의에 속하는 르포쓰기는 언제나 이런 주관주의와 객관주의의 대결적 상황 속에서 어려운 균형을 잡아야 한다는 곤란에 빠질 위험이 있다. 동시에 글을 쓰는 작가의 입장에서는 과연 명백하게 가치중립적인 사실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하는 물음에 직면하게 마련이며, 취재원의 경우는 사실 너머에 있는 스스로의 '내적 진실'이 르포작가에 의해 굴절되거나 잘못된 방식으로 변용될 가능성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에, 하나의 사태에 대해 발언하는 일조차 매우 고된 작업이 될 확률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르포는 왜 쓰는가. 그것이 단순히 발생한 사건과 그것과 연결된 하위주체들의 특수한 상황에 대한 기록에 멈춘다면, 작가 편에서든 취재원 편에서든 그 작업의 가치는 일정한 고립을 피할 수 없다. 그래서 르포작업은 이렇게 특수한 상황적 맥락에서 발생한 사건 속의 인간과 상황이 한때 벌어졌던 일이 아니라, 비슷한 방식으로 앞으로도 벌어질 확률이 높은 사건이라는 것, 다시 말해 '보편성'을 내포한 매우 중요한 사건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작업이 진행될 수 있는 것이다.
르포작업이 추구하는 이 사건에 깃든 보편적 진실에 대한 발굴에의 의욕은 오늘의 미디어적 환경이 매우 왜곡된 상황에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증언적 성격을 확보하고 그것을 강화한다. 대중 미디어의 차원에서 보자면, 발전된 테크놀로지 환경이 언제나 조명하는 것은 대중들의 환상적 무의식과 욕망을 충족시키는 대상들이다. 대중미디어의 영역에서 설사 탐사저널리즘이라는 방법론적 목표를 갖고 제작되는 프로그램조차, 재현의 대상이 된 하위주체들에 가해지는 연민어린 시선이 지배적인 되는 까닭은 그 자체가 이미 대상과의 수평적인 대화능력을 상실하고 있다는 사실을 거듭 환기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