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왕푸징에서 열린 중국 개혁개방 기념 사진전에서, '제1세대 여직공' 웡춘시엔이 개혁개방 시기를 타고 성공한 이야기가 시간순으로 전시되어있다.
이점숙
제1세대 여직공 웡춘시엔의 성공스토리웡춘시엔(翁純賢)은 1981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선전 경제구에 위치한 홍콩완구공장 광고를 길거리에서 우연히 보고 지원해서 제1세대 여직공이 됐다.
120명의 직원을 뽑는 데 무려 1000여명의 사람이 몰렸다고 하니 당시의 극심한 구직난을 알 수 있을 듯하다. 입사시험 문제는 모두 홍콩에서 출제되었으며, 그중에는 지금의 IQ테스트 같은 유형의 문제도 있었다.
웡춘시엔이 풀었던 첫 번째 문제는 어떻게 하나의 사탕을 여러 개로 나눌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대학 졸업장이 없는 사람은 당시의 생산조직에 들어가 일을 하거나, 부모가 알아봐 주는 곳에 들어가 일을 했던 것에 반해 왕춘시엔은 자신의 노력으로 고향을 떠나 대도시로 취업하게 되니 친구들은 다들 부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동경했지만, 그녀의 오빠는 "그곳은 자본주의 세계로부터 가까우니 너무 위험하다, 가지 말라"고 상반된 태도를 보였다.
그렇지만 쉽게 물러설 그녀가 아니었다. 한번 가보고 안 되면 다시 고향에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긴 채, 1982년 4월 30일 선전에 도착했다. 120명이었던 직원들은 채 석 달도 되지 않아 향수병과 고된 생활을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 80명으로 줄었지만 웡춘시엔은 끝까지 남아 일했다. 곧 표준어를 잘 구사하여 조장이 되었으며, 1987년에는 지금의 남편과 3년간의 뜨거운 열애 끝에 결혼했다.
이전에는 회사에서 집을 분배하는 방식이었지만, 이들이 결혼한 1987년도에는 아파트 공개입찰이 처음으로 이루어졌다. 웡춘시엔 부부는 63㎡ 규모의 아파트를 구입하여 세탁기, 컬러TV, 냉장고를 사서 신혼 생활을 즐겼다. 당시 웡춘시엔의 한 달 월급은 인민폐 700위안, 남편 월급까지 합하면 1100위안으로 당시에는 고소득 가정이었기 때문에 주택이나 살림 장만 문제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다.
1990년에는 아들의 출생과 함께 그동안 일해온 완구공장을 떠나 난보 유리공장으로 직장을 옮겼으며, 1994년에는 전문대학에서 학업도 마쳤다. 같은해 남편과 함께 자비를 들여 태국으로 해외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이전에는 주로 회사에서 조직하여 해외여행을 했었지만, 개혁개방 이후 부를 축적해 자비로 해외여행을 할 수 있는 여유 있는 생활 수준이 되었다. 또한 1987년에 구입한 63㎡ 규모의 아파트가 1999년에는 90㎡규모로 바뀌었고, 자동차도 2대나 소유하고 있다고 한다.
웡춘시엔이 만일 그녀의 오빠처럼 자본주의 세계를 두려워한 채 고향에만 머물러 있었다면, 이런 개혁개방의 달콤함은 맛볼 수 없었을 것이다.
덩샤오핑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탄생한 이래 마오쩌둥이 계급투쟁과 고립경제를 옹호하다 내리막길을 걸었다면, 마오쩌둥 사후 정권을 거머쥔 덩샤오핑은 1978년 중국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제3차 전체회의에서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의미)'이란 인식의 전환에서 출발, 시장경제와 사회주의 계획경제가 접목된 실용적 정치노선인 '개혁개방 정책'을 채택하여 중국의 경제성장을 꿈꾸었다.
당시 덩샤오핑은 '4대 현대화(농업, 공업, 과학기술, 국방)'와 경제 발전을 시대적 과업으로 규정하여 각 단계별로 비전을 제시했다. 1단계는 원바오(溫飽, 의식주 등 기초생활이 해결된 상태) 수준의 생활을 이룩하는 것, 2단계는 공산당 창건 100주년이 되는 2021년까지 샤오캉사회(小康社會, 국민 모두 편안하고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는 사회)를 실현하는 것, 3단계로 건국 100년인 2049년까지 선진국에 진입한다는 목표가 그것이다.
또한 농촌의 효율성 제고를 위해 '책임실시제'를 확대 실시하여 농민 스스로 원하는 작물을 선택 생산하고 시장에서 처분해 이윤을 극대화할 수 있는 제도를 실시하고, 연안지역을 부강하게 만든 후 내륙지역을 발전시키자는 '선부론(先富論)'을 제창해 선전, 주하이 등 5개 도시에 경제특구를 설치하는 등 대외개방에 박차를 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