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0월 국가보안법폐지국민연대 소속 회원들이 남영동 대공분실 앞에서 국보법 즉각 폐지를 요구하며 대공분실 담벼락 철조망에 보라색 리본을 매고 있다.
오마이뉴스 남소연
나는 남산 안기부 지하실에서 무려 60일 동안 고문을 받은 끝에 스스로 간첩임을 인정하는 조서에 도장을 찍고 나서 허공을 응시하며 중얼거린 말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이런 식이라면 나라도 안기부장을 단 일주일 만에 간첩으로 만들 수 있어. 암, 만들 수 있고 말고!"
이렇게 억울함과 충격 속에 휩싸인 피해자들은 오랜 세월 교도소 독방살이를 거치면서 몇 가지 흔한 정신의학적인 증상을 갖게 된다.
피해망상과 과대망상증, 고문이 낳은 것그 첫째가 피해망상 또는 대인기피증이다. 지은 죄도 없이 장기형을 살다보니 누군가의 모략이나 의도에 의해 징역을 살고 있다는 피해의식에 늘 시달린다. 이 증상이 심해지면 누구라도 나에게 의심스런 행동을 하거나 지나치게 친절하게 굴면 그것을 곧바로 나에게 피해를 주기 위해 가장하는 것으로 의심한다. 나중에는 주변의 모든 사람을 잠재적인 가해자로 인식하여 대인관계를 제대로 맺지 못하게 된다.
두 번째로 많은 증상은 과대망상증이다. 일반적으로 수사과정에서 피해자들의 '범죄사실'은 몇 배 혹은 몇 십 배 증폭된다. 될 수 있는 한 중형을 때리기 위해서이다. 데모 몇 번 한 것, 또는 사회비판적인 글 몇 편을 잡지에 실은 것을 가지고 '골수 공산주의자'나 '열혈 혁명가'로 수사조서에 기재하고 또 그것을 그대로 세상에 공표한다. 피해자는 반론의 방도가 전혀 없는 가운데 이왕 받은 장기형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한다.
"나는 위대한 혁명가야. 그래, 나는 저 무소불위의 독재자마저 두려워하는 대단한 사상가이지."허구헌 날 독방에 앉아 하릴없이 공상과 망상을 거듭하다 보면 어느덧 자신이 상상 속의 인물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나 역시 최종심에서 무기형을 받고 나서는 "아, 이렇게 무기형을 받을 줄 알았다면 내가 왜 혁명가의 삶에 투철하지 않았던가!"하고 스스로 자책하기도 했다. 고문과 재판과정에서 이미 비정상의 길로 가는 통로가 훤히 열려있었던 것이다.
세 번째는 길게 논할 것도 없는 신체적인 후유증이다. 고문피해자 가운데는 오랫동안 혹은 평생에 걸쳐 신체적 후유증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이명(耳鳴)·신경쇠약·신경발작·협심증·근육파열·만성두통·불면증·헛소리·악몽 등 나열하자면 끝이 없다.
2008 UN 고문피해자 지원의 날 기념대회 |
때·곳 : 2008년 6월 26일(목) 오전 10시30분 12시 국가인권위원회 배움터 전문가발언 : 정혜신(정신과 전문의), 이화영(내과 전문의), 박원순(희망제작소 상임이사)
고문피해증언 : 송기복(82년 송씨일가 간첩단사건), 황대권(85년 구미유학생사건), 홍성담(89년 민족해방운동사 걸개그림 사건), 함주명(83년 이근안 고문피해자)
사 회 : 강용주(가정의학과 전문의)
주 최 :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재)518기념재단, 엠네스티한국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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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역시 위에 적은 일반적인 증후군에 오랫동안 시달렸다. 그러나 감옥에서 야생초를 기르며 상처의 상당 부분을 치유할 수 있었고, 나를 아끼는 수많은 지인들의 격려와 사랑에 힘입어 온전한 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나는 지극히 예외적인 행운아이다. 아직도 수만일지 수십만일지 모를 고문피해자들이 사회의 어두운 그늘에서 희망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는 마당에 나만이 홀로 '성공한' 출소자 노릇을 하고 있는 것 같아 자괴스러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고문피해자는 운수 사나운 범죄자가 아니다다시 한번 묻고 싶다. 고문피해자들은 대한민국 국민이 아닌가? UN이 정한 세계인권규범 제5조는 고문의 근절과 금지를 명시하고 있다. 우리 나라는 유엔가입국가일 뿐만 아니라 유엔사무총장을 역임하고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부끄럽지도 않은가?
현재 고문을 자행하고 있지 않다고 하여 과거의 범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고문피해자들은 그 때 이래로 지금까지도 고통 속에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