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드리드의 한 레스토랑에서 즐긴 점심식사허겁지겁 먹은 탓에 이미 메인요리가 사라지고 없다. 한 병 통째로 상에 오르는 와인과 전채, 메인요리, 디저트로 이어지는 풀코스 점심이 10유로. ‘메뉴 델 디아’의 힘이다.
이은비
덕분에 저는 그날 이후 매번 점심을 먹을 때마다 혼수상태였습니다. 와인은 도수가 낮기 때문에 웬만하면 취하지 않는 법이지만, 점심마다 반주로 와인을 한 병씩 마시다 보면 취하긴 취하되 완전히 취한 게 아니라 은근히 취기가 오르면서 적당히 세상이 아름다워 보일 정도가 되는 법입니다.
그리하여 그날 오후의 그림 감상은 그야말로 주(酒)님을 영접해 영혼이 한껏 고양된 상태에서 이루어지게 된 겁니다. 스페인 풍으로 느긋하게 점심식사를 즐긴 우리는, 정말 시에스타(낮잠)라도 즐기고 싶은 기분을 참으며 원래 계획보다 한참이나 늦은 시각에 프라도에 입장했습니다.
'유럽3대 미술관' 프라도 미술관에서 어마어마한 그림들에 체하다2층의 고야관부터 입장하자, 한쪽에 나란히 걸린 <옷 입은 마하>와 <옷 벗은 마하>가 눈에 들어옵니다. 어릴 때부터 어째서인지 고야의 <옷 벗은 마하>를 보면 부끄럽고 외설적인 기분이 들곤 했는데, 이제 성인이 돼 그림 앞에 선 저는 그 기분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는 이제, 단지 여체의 아름다움을 찬미하기 위해 붓을 들었던 화가들과는 다른 자세로 고야가 이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을 인식합니다. 여성을 타자의 시선으로 물화(物化)해서 그 아름다움만을 드러내 보이기에는, 이 익명의 여인은 너무나도 당당하고 도발적이며 자기 색이 뚜렷합니다.
유례가 없을 만큼 자기 주장이 당당한, 그래서 르네상스 시대 숱한 미술가가 그린 누드모델들은 ‘저 여자 누구야?’라고 물어보지 않아도 될 만큼 밋밋하지만 고야의 <옷 벗은 마야>만은 그 모델이 대체 누구인지 궁금하게 만드는 힘을 가진 여인. 훗날 마네가 그린 <올랭피아>의 모태가 된 여인.
저는 그 마하를 시작으로 미술관을 탐험하다가 곧 숨이 가빠져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아마도 바로크 미술 전시실을 지날 때 즈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상하게 명치끝이 아리면서 식은땀이 나고, 온 몸의 힘이 쭉 빠져나가는 느낌이었지요. 미술관 의자에 앉아 방 안을 둘러보던 저는 이 고통의 원인을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엄청난 양의 대가들의 그림이, 그야말로 벽마다 빼곡히 걸려서 저마다 말을 걸고 있었습니다. 어떤 것은 소곤소곤 말을 걸고, 어떤 것은 쩌렁쩌렁하게 일장연설을 하고, 어떤 것은 엄한 목소리로 훈계하고, 어떤 것은 언제까지나 혼자서 중얼거리고 있었지요. 그 그림들 하나하나가 살아 있었습니다.
그림의 이미지를 받아들이기 위해 제 머리는 지나치게 가열된 상태였습니다. 전시실을 들어설 때마다 안구를 통해 두뇌로 밀려드는 수많은 색채의 향연. 라피스라줄리의 찬란한 푸른색, 에메랄드의 장엄한 녹색, 눈부신 금색과 붉은색과 온갖 귀중한 안료로 색을 낸 엄청난 색채의 향연이 저를 압도했습니다.
“무슨 일이야? 어디 아파?”라고 걱정스럽게 묻는 친구에게, 저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습니다.
“그림에 체했나봐.”
덧붙이는 글 | 이 여행기는 2007년 2월 13일부터 일주일간 스페인을 여행한 뒤 작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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