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3> 세계사적 정치지형과 한국의 정치지형
상황을 이렇게 이해한다면 우리 사회에서 중도가 무엇인지가 아주 명확해진다. 우리 사회에서 중도는 세계사적으로 보았을 때는 극우에 속한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극우에 속하는 사람들이 세계사적으로 중도가 대세이므로 중도라고 주장하고, 화해와 상생을 위해 중도가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불행한 현실이 바로 한국의 현실인 것이다.
<그림 3>은 또한 중요한 진실 하나를 보여주고 있다. 서구의 사람들이나 우리나라 사람들이 모두 행복해지고자 하는 동일한 욕망을 가졌고, 또한 충분한 정책적 대안이 왜곡됨이 없이 제공되었고 가정할 경우, 그래서 우리 국민들이 이념적 분화가 글로벌한 수준의 정상분포와 다르지 않다고 할 경우, 그림의 오른쪽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의 정치지형에서 우파는 과대 대표되고 있으며, 그림의 왼쪽에서 알 수 있듯이 좌파는 과소 대표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대다수 국민들의 이익은 국회에서 대변되지 못하고, 특정 집단의 이익만이 국회에서 대변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중도세력들이 정말 중도를 주장하려면, 그 중도가 글로벌한 수준에서의 중도가 되려면 우리나라의 정치지형은 훨씬 왼쪽으로 가야한다. 그러니까 중도가 진정한 중도세력이려면 중도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진보를 주장해야 한다. 그런데 그들은 진보를 주장하지 않고, 중도를 주장한다. 그 의도는 명확하다. 현실의 권력구조를 변화시키고 싶지 않다는 것이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계속 지켜나가겠다는 것이다. 과거의 극우를 포장하는 새로운 거짓말, 중도는 극우의 다른 말인 것이다.
중도, 또 하나의 양비론
우리 사회에서 '중도'가 갑자기 튀어나온 것은 아니다. 최근의 중도의 논리는 독재시절 양비론을 닮아있다. 양비론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두 입장을 동시에 비난함으로써 현실을 고착화시킨다는 점이다. 현재에 문제가 있을 때, 예를 들어 독재라는 문제가 있을 때, 독재를 비판하고 그것에 반대하는 세력도 비판하는 것은 현실을 그대로 두자는 것이고, 따라서 독재를 유지하는 기능을 한다.
중도도 마찬가지다. 보수와 진보를 양극단으로 비판하면서 자신들은 무언가 중립적인 입장을 제시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현실을 변화시키지 않겠다는 의도를 감추고 있는 것이다. 양쪽을 비난하지만 극우적인 현재의 정치지형을 유지하고, 그럼으로써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겠다는 중도야 말로 독재시대 양비론의 현대적 버전이라 할 수 있다.
민주화가 되면서 우리 사회에서도 양비론이 많이 없어지고 있다. 특히 최근들어 보수와 진보간의 뚜렷한 대립선이 그어지면서 한 입장을 택하기를 강요받고 있다. 사회가 보수적 관점과 진보적 관점으로 나뉘어 지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나는 것'처럼 각 세력들이 자신의 대안을 만들고 그것이 합리적으로 토론되고, 토론결과에 대한 이성적 승복이 이루어진다면 보수와 진보의 갈등은 사회발전의 동력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 사회는 보수와 진보로 나누어지고 있지만, 우리의 정치는 합리적이고 비판적인 정책적 토론이 이루어지기 보다는 감정적 증오나 도덕적 폭로가 주를 이루고 있다. 여기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정치집단이 이념과 정책으로 분화하기 보다는 중도라는 이름의 새로운 양비론으로 변신한 것도 중요한 이유라 할 수 있다. 우리 정치가 이념과 정책에 따라 분화하기 위해서는 이 중도라는 새로운 거짓말이 없어져야 한다.
화해와 상생을 위하여
한 집단이 사회를 지배하기 위해서는 헤게모니, 즉 '지적, 도덕적 지도력'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헤게모니를 갖기 위해서는 즉 정신적 지도력을 갖기 위해서는 물질적, 정신적 양보가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형이 동생에게 심부름을 시킬 때 1만원을 주면서 7000원 정도 물건을 사오고 나머지는 심부름 값으로 주여야 동생이 싫더라도 심부름을 할 것이다. 바로 이렇게 3000원 정도의 물질적 양보와 정신적 배려가 있을 때 헤게모니는 작동될 수 있고, 한 사회는 대립보다는 타협이 우선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화해와 상생을 원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서 화해와 상생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헤게모니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 사회의 기득권 집단이 화해와 상생을 진정으로 원한다면 중도같은 말장난을 하기 보다는 물질적 양보, 정신적 양보를 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세계적인 의미에서 중도우파정도의 정책을 제시하여 물질적 양보를 하고, 사회의 다양한 가치를 인정하는 정신적 배려를 할 때, 우리 사회는 화해와 상생이 이룰 수 있다. 실업과 비정규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말뿐인 중도는 너무나 가혹한 거짓말이다.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면서, 기득권 세력들은 다시 중도라는 만병통치약을 팔고 있다. 1950년대 시골장터의 약장사같은 정치를 21세기에도 지속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의 여론조사를 보면, 유권자들은 한나라당도, 열린우리당도 보다 진보적으로 변화하기를 바라고 있다. 다시 말해서 국민들은 이제 만병통치약이 아무 병도 고치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병을 악화시킬 수 있음을 알고 있는 것이다.
국민들은 한국 사회의 문제를 해결해 줄 새로운 정치적 리더십을 바라고 있다. 그리고 새로운 정치적 리더십의 형성은 극우의 다른 말인 중도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각 세력이 자신의 이념과 정책을 명확히 제시하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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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중도', 독재시대 양비론의 현대적 버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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