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에서 '청자칠보무늬향로'(사진에서는 유리에 반사된)를 보고 보고 또 보는 제주도의 눈들. 초강행군 3일째 일정이었음에도 그들에겐 피로라는 단어가 없는 듯 했다.곽교신
제주특별자치도의 박물관장과 학예사 등으로 구성된 제주도박물관협의회(회장 한종훈) 회원 45명이 서울과 경기도의 대표적인 박물관과 미술관을 순회하는 3박 4일간의 일정을 마치고 15일 오후 제주로 돌아갔다.
오는 26일 순회결과를 자평하는 세미나와 다음날(27일) 열리는 토론회를 끝으로 행사를 마치는 이들의 행보가 단순한 견학 이상의 의미로 평가하고 있다.
이번 순회 방문의 제목은 '고랑몰라 봐사 알주!'다. 제주도 방언으로 '백문불여일견'이란 뜻이라고 한다. 행사의 제목처럼 낮은 자세로 직접 보고 배우러 온 그들을 지켜본 사람들은 잔잔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박물관인들을 흔히 '자존심의 덩어리'라고 표현한다. 때론 고집불통으로 불리기도 한다. 특히 콜렉터에서 출발한 박물관은 남의 것을 보고 배우기보다 내 것을 주장하기에 더 익숙한 경우가 많다.
더구나 최근 한국 박물관계는 한국박물관협회(회장 김종규) 현 회장단의 임기가 올해 말로 끝나고 차기 회장을 뽑아야 하는 시점에서, 선거 관련해 일부에서 혼탁 조짐을 보이고 있어 박물관계 내부가 어수선하기도 하다.
이런 가운데 제주도박물관협의회 방문단이 자신을 낮추고 타지역의 박물관을 있는 그대로 보고 배우겠다는 자세로 방문한 것은 전체 박물관인들에게 신선한 메시지를 던졌다는 평가다.
제주협의회의 방문을 받은 서울의 한 중견박물관장은 방문단의 일정표를 보고 "살인적 스케줄"이라고 혀를 내두르기도 했다. 방문단의 행보가 견학을 빙자한 유람이 아닌 진지한 학습 순회였던 것은 곳곳에서 보였다.
늦더위에 땀을 흘리면서도 "하나라도 더 보자!"
보통 산업연수나 시설견학 등의 실제 내용을 들여다보면 포상휴가 성격을 띠고 단체 유람인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첫날 일정부터 2∼3시간씩 동행하면서 본 방문단의 자세는 초등학교 신입생들 같아서 동행취재가 그들의 학습에 방해될까 염려했을 정도.
방문단은 지난 13일 오전 11시 서울 동숭동 쇳대박물관부터 15일 삼성미술관 리움까지 모두 15개 박물관과 1개 미술관을 순회한 이들의 스케줄은 참가자들의 표현대로 '빡센(빡빡한)' 일정이었다.
둘째 날 점심시간. 메뉴는 종로구 원서동 중국음식점의 잡채밥. 12시15분에 시작된 점심은 12시 40분경 끝났다. 이런 경우 최소한 1시까지는 쉬다가 출발하는 것은 상식이다. 그러나 그들이 식당을 나선 시각은 12시 45분.
"일정이 빡빡합니다. 걸으면서 소화시킵시다" 하는 인솔책임자 정세호 제주박물관협의회 사무국장의 말에 한 여성 학예연구원은 "사람을 잡네, 잡어" 한다.
점심을 먹은 식당 근처에 있는 불교미술박물관을 찾은 방문단. 이곳에서 스테인리스로 된 안내 패널꽂이를 유심히 관찰하는 조보미 연구원(표선 제주민속박물관)에게 말을 걸었다. 패널꽂이는 일반 관람객들에게는 관심 밖인 전시 보조물이어서 왜 유심히 보는지를 물었다.
조 연구원은 "우리 박물관은 이게(패널꽂이가) 나무로 되어있어서 안정감도 없고 보기도 안 좋은데, 이걸 모델로 삼아 바꿔볼까 생각한다"며 진지한 표정으로 답변했다. 그러더니 여러 각도에서 사진을 찍는다.
불교미술박물관을 나와 곧바로 북촌 한옥 동네의 비탈골목길을 오르락내리락했다. 북촌 한옥 동네 순회도 방문단의 계획된 일정의 하나라고 한다.
사라져가는 서울의 한옥을 주제로 노상 토론을 하며 가회박물관으로 향하는 일행을 뒤에서 보니 성지순례객을 연상케 한다.
골목 언덕 밑에서 뒤처진 여성 관장에게 '다리가 아프지 않냐?'고 묻자, "아프긴 하지만 하나라도 더 봐야죠"라며 웃는다. 제주도에서 온 방문단이 서울에 놀러 온 평범한 여행객이 아니라는 것은 그들의 행보 곳곳에서 묻어나왔다.
정미정 연구원(서귀포 감귤박물관)에게 '뭐 배울 것이 있기는 있느냐'고 묻자 단호히 "네!"한다. 이어 정 연구원은 "여러 박물관의 건물 모습, 다양한 전시 기법, 관내 분위기 등에서 제주보다 현대 감각이 월등한 것을 확연히 느낀다"며 "많은 자극을 받고 갈 것 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