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래난초

얽힌 타래 스르르 풀리듯

등록 2006.08.04 15:13수정 2006.08.04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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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그래왔지만, 올 여름은 유난히 허둥대며 지내 왔다. 몸과 마음이 각자 제 갈 길을 가겠다고 버팅기기도 하고, 모가지 내 놓고 이제나 저제나 하던 꽃들이 시들시들 앓아야 할 정도로 겅중겅중 못난 송아지마냥 갈피를 못 잡고 헤맸다.

이정우
거기 그 자리에 가면 타래난초가 빙긋 웃어 줄 거고, 도랑을 한 번만 건너면 하늘말나리가 두 팔 벌리고 안아주겠다고 달려들 것만 같은데 정작 몸은 집 울타리 안에서 헤어나질 못 하고 있었다. 지금쯤을 피었겠다 싶다가도 혹시 다 졌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도 들고 내가 타래난초를 그리워하는 것처럼 그 아이 역시 날 기다리고 있으면 어찌할까라는 엉뚱한 상상이 날 지배했다.

이정우
타래난초가 봉긋이 웃던 그 즈음에 난 무지 바빴다. 구년 만에 이삿짐을 싸 보기도 했지만, 먼지처럼 쌓아 묻어 놓고 살아온 살림살이들이 유일한 취미생활인 꽃사랑 마저 빼앗아 놓고 내게 잰 걸음을 요구했다.

미련이 많아 뭐든 훌쩍 버리는 일은 못 한다. 그러다 보니 버리지도 못 하고, 그렇다고 알뜰살뜰하게 사용하지도 못 하면서 어정쩡하게 창고만 가득 채워 버린 꼴이 되었다. 너저분한 내 일상의 흔적들이.

이정우
장맛비는 하늘을 꺼멓게 덮었다가 간간히 걷어내기도 하고, 땅바닥은 뜨건 열기를 뿜어대면서 여름이니 의당히 푹푹 쪄야겠다는 듯 기세가 뜨겁다. 잠깐 비 멈추고, 볕 나는 오전에 만사를 제쳐두고 눈앞에 뱅뱅 도는 타래난초를 보러 나섰다.

그렇게 장마철에 볕이 나면 보통의 아낙들은 이불을 들고 옥상으로 올라가든가 빨래 건조대를 볕이 잘 드는 곳으로 옮기며 눅눅해진 빨래, 이불을 말려야 하는데 난 달랑 디카 하나 챙기고 배배꼬인 아이가 보고 싶어 훌쩍 떠났다.

이정우
땀은 났다. 당연하다. 여태까지 있을까. 다 지고 아무것도 없으면 어쩌지 하는 염려스러움. 산소가 나란히 있는 산골짝으로 들어섰다. 가물가물, 조바심 내며 걷는 나를 의식이나 한 듯 배배꼬인 아이는 숨바꼭질 하자는 듯 첫눈에 들어오지 않고, 한참 만에 눈에 띄었다.

생생한 것은 없었다. 꽃 필 자리마다 초롱초롱 하게 반짝반짝 윤이 나듯 그렇게 예쁘게 피어 주길 바라면 내가 얌체 짓을 한 다는 걸 알면서도 다 져 가는 타래난초에 힐끗 눈길한번 주고 다시 더 찾았다.

없었다.
달랑 두 개체.

이정우
좀 서운했지만, 넋 놓고 서운해 할 처지도 못 된다. 서둘러 눈을 맞췄다. 일찍 지지 않고, 늑장을 피워준 타래난초에게 고마워하며, 땀이 많이 흘렀다. 눈으로 들어갔는데 따가웠다. 그래도 좋았다. 못 볼 줄 알았던 아이를 이렇게 만나고 있으니까.

분홍재롱둥이 한 번 쳐다볼 때마다 내 머릿속을 남은 시간 쪼개기에 바빴다. 오늘 할 일 중에 김치냉장고는 큰 녀석보고 닦아 달래고, 쌀통은 좀 낡아서 잘 닦아야 하는데, 서랍도 부실하니 남편보고 닦고 조여 달라 그러고, 작은 녀석은 빨래를 잘 널고 개키니까 옷장 정리를 좀 해 달래야겠다는 결론을 내리자 갑자기 마음이 편안해 졌다.

이정우
예쁜 아이, 타래난초다.
새끼줄처럼 꼬아 놓은 자리마다 꽃이 폈다. 분홍참새들이 일렬로 모여 분홍색의 아침 회의를 하는 모습으로 하늘을 향해 나란히, 그리고 조금씩 나선형의 고리처럼 돌려가면서 꼬였다.

실타래처럼 배배꼬여서, 나선형처럼 뱅뱅 돌아서 타래난초라 불리 운단다. 할미꽃처럼 무덤가에 많이 피고, 피기 전엔 잔디와 섞이면 구분이 어렵다. 삐쭉한 이파리 사이로 꽃대가 올라올 때까지도 눈에 띄지 않다가 분홍빛이 도는 타래를 만들고 나서야 타래난초라는 걸 알아 볼 수 있을 정도다.

이정우
차근차근 실타래 풀어나가듯 피치 못할 사정으로 꼬여 있든 꼬여 있지 않은데도 꼬여 있는 것처럼 보이든 내게 다가온 타래난초를 보는 순간 모든 것이 스르르 제풀에 풀림을 감지했다.

뭐든 꼬여 있을 필요는 없다. 스스로든 타인에 의해서든 타래난초처럼 하나하나 풀어나가며 마디마디 예쁜 꽃을 피워낼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보금자리를 옮기고, 사진첩에서 다시 꺼내 보는 타래난초.
그 산 속의 아이는 아마도 씨앗 묻기 바쁠 요즘일거다. 내년에는 허둥대지도 말고, 비비 꼬이지도 말고, 좀 더 현명한 내가 되어 타래난초를 찾아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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