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제가 '옷 행상'을 시작했습니다

처제를 보고 느낀 '새옹지마'

등록 2004.06.04 11:38수정 2004.06.04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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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일의 일이다. 오전에 몹시 바빴다. 다음날 한 동안 방치해 두었던 지방 출장도 있어 , 다음날 해야 할 일까지 몰아 결재해야 했으므로 정신이 없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까맣게 잊고 있던 점심 약속이 있다는 것을 오전 10시경에 알고 더 허둥거렸다.


약속한 점심시간, 6명이 앉아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하는 도중에 핸드폰이 울렸다. 아내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처제가 내가 사는 아파트에서 좌판을 벌였으니 시간나면 오라는 연락이었다.

"그래? 금방 갈께."

아내가 말한 처제는 부천에 사는 작은 처제였다. 아내는 내가 군대에 있을 때 만났다. 당시 처제는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처제는 순발력 있는 머리와 늘씬한 키 그리고 서글서글한 성격 탓으로 학교에서 연대장도 했고 응원단장도 했다. 어딘지 모르게 조숙하고 활달하게 보였고, 어지간한 어른보다 더 사려 깊은 아이였다.

처제가 사회생활을 할 때 집안이 한 번 뒤집어지는 사건이 발생했다.같은 직장의 남자 상급자가 퇴근 길에 태워다 준다는 구실로 처제를 강제로 여관으로 끌고 간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처제가 완강하게 저항을 했고, 심각성을 인식한 여관 주인의 도움으로 무사히 돌아왔지만, 대충 넘어갈 수 없는 사건이었다.

처남과 의논을 했다.
"잡아다가 혼을 내 줘야지 그냥 넘어가면 반복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지 않겠어?"
그런데 당사자가 제발로 처갓집에 찾아 와서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작은 처제에 대한 기억들

세월이 흐른 어느날 처제가 결혼할 상대를 처갓집으로 데리고 와서 선을 보였다. 바로 그 사람이었다. 처제가 변명처럼 말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이 사람이 날 공주로 받들어요."


난 맏사위 자격으로 지금 동서가 된 사람의 면접을 보았다. 1번 집안 환경조사, 2번 성격조사, 3번 학력조사, 4번 생활력조사 등을 나름대로 살핀 후에 장모님에게 보고서를 작성했다.

"알아서 하세유. 야가 고스톱을 칠 때 광만 팔 인간으론 보이지 않는 구먼유."

처제는 그 사람과 결혼했다. 결혼만 하면 동서 군기를 잡겠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왜냐하면 그 동서는 자기 돈으로 자기 집을 사고 자기 돈으로 자기 살림을 장만하고 자기 돈으로 사는 도리에 대한 구실을 확실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일들은 셋방살이를 하던 당시의 내 입장을 더욱 옹색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렇게 세월은 흐르고 그 동서는 회사를 설립했다. 요즘도 날마다 여성지를 도배하고 공중파에 나오는 대기업에 여성의류를 생산하여 납품하는 공장이었다. 당시 나는 작은 회사의 주임에서 갓 과장이 됐을 때였다. 내가 자동차를 엑셀을 탈 때 동서는 슈퍼살롱을 타고 다녔다. 내가 장모님에게 큰맘 먹고 만원짜리 월남치마를 하나 사다 드리면 그 동서는 현금을 다발로 가져와 내 기를 꺾곤 했다.

명절에 고스톱을 칠 때 난 자존심이 상해 쓰리고를 부르면서 악착같이 오고가는 현찰 속에 밝아오는 고스톱 사회를 부르짖었지만, 동서는 그러한 내가 재미있다는 듯이 약을 올리다가 온 식구를 몰고 나가 생색을 내곤 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동서가 처갓집을 향하는 발길이 뜸해졌다. 형부 형부하면서 안부를 묻던 처제도 덩달아 멀어졌다. 까닭을 물었다. 아내가 말했다.
"많이 힘든가 봐. 어렵대."

처제네가 힘들다는 말은 그 후로 열 번인가 더 들었다. 그 동서를 제외한 나머지 동서들이 모였을 때 조심스럽게 말했다.

"동서는 고생을 안해 봐서 더 힘들지 않을까? 마음으로라도 소외감 느끼지 않도록 각자 노력했으면 좋겠네."

어느 날 밤 아내가 전화를 하는 것을 우연히 들었다. 몹시 화를 내고 있었다. 넥타이를 풀면서 물어 보았다.

"무슨 전화야?"
아내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설명을 했다.
"기가 막혀서. 삼천만원을 꿔달라고 해서 돈 없다 하니까 집이라도 보증 서 달라고 했어. 우릴 얼마나 깔보았으면 그런 말이 나오나. 형제가 우리뿐야. 안 그래도 걔네 회사 망할 것 같던데. 우리가 무슨 돈이 있다고. 안 된다고 했어."

뭐야! 넘어오는 분노를 목구멍으로 삼키면서 부드럽게 말했다.
"하 삼천만원! 우리가 무슨 돈이 있다고. 아무 소리 말고 처제한테 집 담보 서줘!."

아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날 처음으로 아내 앞에서 문자를 사용했다.
"이것 보세요. 처제는 당신과 피를 나눈 형제예요. 오죽하면 나같은 가난뱅이한테 도움을 청했겠어요. 그런 말 쉽게 나오는 것 아닙니다. 처제도 우리 사정 알아요. 망설이고 망설이다 힘들게 말한 거예요. 삼천만원이 인생의 전부는 아닙니다. 그 돈이 우리 복이 아니라면 대출을 하지 않아도 다른 것으로 날아갈 것이고 그 돈 삼천만원이 우리 복이라면 처제가 그 돈 갚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화만 내지 말고 그렇게 한다고 하세요."

완강하게 거부하는 아내를 뿌리치고 처제에게 전화를 걸었다.

" 하하 처제야.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그렇게 하자. 심란하게 생각하지 말고 필요한 만큼 보증 서 줄께, 알았지?"

그때로부터 몇 년이 흘렀다. 올해 3월, 동서가 공장문을 닫았다. 정부 정책이나 인간을 믿느니 차라리 짐승을 믿는 것이 훨씬 가치 있는 일이라는 말을 남기고 고향에 내려가겠다고 했다. 그리고 조만간 짐승이나 기르면서 살겠다고 했다.

처제의 집은 국세체납으로 압류를 당하고 기타 조금 남아있던 재산은 차라리 도둑질을 하지 데리고 있던 직원들의 임금은 떼어먹지 않겠다는 인간의 인간에 의한 지극히 인간적인 결단으로 날아갔다.

남아있는 것은 일류메이커 상표가 붙은 납품거절로 쌓여있는 여성의류 뿐이었다. 동서는 혼자 시골로 내려가고 (다행히 고향에는 물려받은 땅마지기와 잘나갈 때 살던 집을 새로 증축한 신식 집이 남아 있다) 처제가 남아있는 옷가지를 팔아 생활비에 보탠다는 가슴 아픈 이야기가 들려왔다.

아파트에서 처제는 한 벌에 이십만원이 넘는 옷을 만원에서 삼만원 사이로 팔기에 여념이 없었다. 처남댁도 와 있고 오늘 회사 창립일이라 쉰다는 처남도 와 있었다. 처제를 거들던 아내가 말했다.

" 아파트 부녀회장한테 사정을 했어. 하루만 팔게 해달라고. 그런데 우리 아파트 너무 수준 낮다. 만원도 비싸대."

처제가 나를 보고 눈시울을 붉혔다.
"형부, 나 이렇게 살아요."
많이 늙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십수 년간 사장님 사모님이었는데, 오늘 매출이 삼십만원이라고 했던가. 이익은 고사하고 남편을 망하게 한 원단 값과 인건비의 절반도 안 되는 돈을 쥐고 쓸쓸하게 웃는 처제가 참으로 안쓰러웠다.

"뭐 어떠냐? 보기 좋은데. 조금 기다려. 내가 다 팔아 줄께."
다음 주부터는 일을 잠시 접고 처제의 옷을 팔러 다녀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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