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12일 밤 대통령 탄핵에 반대하여 여의도에 모인 성난 군중정상택
“이 나라 국민으로 산다는 것이 힘들다기보다 차라리 서글프다는 생각이 드네.”
정오가 가까운 시각, 근무 중인 아내가 보낸 문자메시지를 보는 순간 나는 가슴이 쿵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결국 벌어지고 말았구나!
설마하며 지켜보던 '대통령 탄핵'이라는 전대미문의 날치기.
그들은 끝내 자신들이 꾸민 음모와 야합의 예정된 수순을 밟았을 뿐 결정에 이르는 과정 어디에서도 70%가 넘는 탄핵반대의 국민 여론은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텔레비전을 보지 않았지만‘표결’이라는 절차의‘합법성’을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있을 저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거기에 그들은 자신들의 행동이‘국민의 여망’을 반영하여 고뇌 끝에 선택한‘구국의 결단’이라는 식의 황당한 궤변을 덧붙이고, 있을 것이다.
'말의 성찬’이 뒤따르지 않는 쿠데타가 있었던가? 60년대 박정희의 오일육이 그랬고, 80년의 전두환 오일칠이 그랬다.
오후의 업무는 엉망이 되어버렸다. 이건 아니다. 정말 이것만은 아니다. 답답함과 치밀어 오르는 분노로 눈에 들어오지 않는 서류들을 뒤적일 수밖에 없었다. 무엇인가 해야하겠는데, 그저 어제와 다름없이 업무에 매여 있어야하는 월급쟁이인 자신이 자꾸 무기력하고 한심하게 생각되었다.
돌이켜보면 저들은 우리의 일상에 대한 자부심까지 짓밟아 왔다.
달마다 박봉을 쪼갠 깨알같은 글씨로 가계부를 채워도 중년이 되도록 생활은 좀처럼 피지 않지만 아내는 늘 작은 일에 감사할 줄 알았고, 다가오는 미래와 딸아이를 위해서 무엇인가 소담스런 꿈을 담아 둘 줄도 알았다. 그런데 저들은 사과상자와 트럭에 실린 검은 돈의 음습하고 추잡한 굴레를 우리의 떳떳한 자부심과 앞날에 거는 작은 꿈 위에 덮어씌우지 않았던가.
저들이 그렇게 우리들에게 강요한 한숨과 절망의 끝에서 어떤 이웃은 아이들과 함께 높은 아파트에서 몸을 던지고, 어떤 노동자는 스스로의 몸에 불을 붙였던 것이다.
무엇인가를 하고 싶었고, 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더 많은 날을 우리는 비탄 속에서 지내게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 속은 어지럽고 퇴근시간은 더디게 다가왔다. 일과를 마치고 아내와 함께 강변도로로 차를 몰아 달려간 곳은 여의도 국회 앞이었다.
국회 주변은 온통 경찰버스가 에워싸고 있었다. 골목 어귀에 차를 주차시키고 마이크 소리가 울려나오는 집회 장소를 찾아 갔다.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 자리를 잡고 오래도록 부르지 않았던 옛 노래들을 목청을 가다듬어 부르기 시작했다.
언제였던가. 아마 87년 6월이었을 것이다. 그 해 6월을 겪은 사람이라면 두려워 웅크리던 마음을 벗어던지고 마침내 거리로 뛰쳐나갔을 때의 벅찬 감동을 잊지 못할 것이다. 나는 촛불을 들지 않은 손으로 아내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 속삭여 주었다.
아내여! 당신 말대로 이 땅에서 사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결코 서글퍼 하지 말기로 하자. 서글프다니! 여기 질식과 분노의 가슴들은 이렇게 모여 함성으로 슬픔과 눈물을 다시 걷어내고 있지 않는가. 그해 6월처럼.
3월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