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연호 전 민주당 은평을 지역위원장 (사진: 정민구 기자)
은평시민신문
- 2004년 열린우리당을 시작으로 정계에 입문한 뒤 2016년에는 민주당을 탈당해 국민의당에서 활동을 했고 2022년엔 민생당에서 탈당해 다시 민주당으로 복당을 했는데요, 지난 20년 간의 과정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겉으로는 민주주의 외치지만 뒤에서는 다른 행동하는 사람들이 예전에도 있었어요. 저는 계파주의 반대하면서 누구한테도 줄 서지 않았어요. 대신 이런 정치하지 말라고 끊임없이 덤볐죠. 그 결과는 늘 공천배제였습니다. 그러면서 또 지역 현장은 지키라고 해요. 말이 안되는 거죠. 민주당이 제대로 서야 윤석열 정부를 견인할 수 있습니다. 이런 썩은 정치하는 사람들이 이미 2010년부터 자리 잡았고 이 사람들이 바로 수박정치의 뿌리입니다. 어느날 갑자기 수박정치가 온 게 아니에요."
- 민주당의 정신을 따르지 않고 말하자면 권모술수 정치를 하는 이들이 있다는 의미인가요?
"권모술수가 아니라 총체적으로 문제가 있는 겁니다. 껍데기만 민주당 간판을 쓰고 당 대표를 팔아먹고 있지만 하는 행동은 더 한 거죠. 자리 차지하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모습이 더 고약한 거죠. 민주주의는 실천할 때 의미가 있는 것이지 민주주의를 악세사리로 걸쳐 놓는 건 독재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 은평을 지역은 현역 의원이 3선 도전을 하는 지역인데요. 도전하는 입장에서 어떤 전략이 필요하다고 보는지?
"정치는 현장에 답이 있습니다. 골목길에서 거리에서 주민들을 만나면 얼마나 민생이 어려운지 체감할 수 있어요. 사실 전략이라고 할 게 뭐가 있을까요? 이렇게 주민들과 한 걸음 한 걸음 함께 하는 것뿐이지요. 제가 민주당 간판으로 한 번도 못나와 봤지만 주민들은 아시는 거 같아요. 이쯤되면 고연호 그만하라고 할텐데 오히려 한 번 해보라고 응원을 해주십니다."
- 20년 이상 정치를 하면서 후보님이 추구하는 가치는 무엇인가요?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크레파스 하나, 도화지 하나를 제대로 가지고 다니지 못했어요. 수업준비를 못해가니까 미술시간에 멍 때리고 있어야지 체육복 없으니 또 그렇지, 그럴 때 참 아이가 고통스럽습니다. 부모님은 항상 열심히 사시는데 늘 생활이 어려우니 우리 부모님 같이 열심히 사는 분들이 잘 사는 사회가 되는 거 아닌가, 내가 그런 사회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대학을 가서 보니 내가 잘못생각한 게 아니구나 하면서 선후배 친구들과 열심히 운동을 했어요. 집안의 가족들이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하면서 고문당하고 죽고 다친 얘기를 어려서부터 들었기 때문에 고연호 개인의 행복이 아닌 민주주의와 민생을 위해서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일찍부터 했습니다. 지금도 그 생각은 똑같습니다."
- 어렸을 때 느꼈을 소외감이 매우 컸을 거 같습니다.
"엄청 고통스러웠죠. 대학에 가서도 사업을 할 때도 마이너에 속했던 거 같아요. 주사파가 된 친구들이 많았는데 저는 그건 아니라고 봤어요. 세습은 어떤 이유로든 북한사람들에 대한 탄압이고 김일성 일가가 해 먹은 것도 엄청난 역사적 죄인인데 그걸 아들한테 또 3대로 이어진다는 건 정말 말이 안되는 거죠. 그래서 386세대이면서도 저는 결이 다른 쪽이었죠."
- 후보님이 지향하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본인만의 장점은 무엇인지 소개부탁드립니다.
"제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말씀드리는 게 더 좋을 듯 합니다. 대학다닐 때 서대문경찰서, 안기부, 학교당국의 반대를 무릎쓰고 이화여대 학생회를 만들었어요. 당시 학도호국단이 있었는데 이거 다 물리치면서 학생선거를 했어요. 재학생이 2 만명이었는데 아주 성공적으로 마무리지었죠. 연세대가 같은 날 선거를 했는데 이대 투표율이 3% 더 높았습니다. 제가 기획하고 다 만들어냈습니다.
그 뒤로 졸업을 했는데 같이 운동하던 친구들은 공장을 간다, 혁명을 한다 얘기할 때 저는 학생운동은 김대중 민주주의 정부 수립까지가 맞다, 그 이상은 사회를 혼란스럽게 한다는 분명한 소신이 있었어요. 그래서 농민운동, 공장취업 안 했어요. 당시 (운동권)분위기가 결혼, 진학은 별로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저는 사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부모님 노후대책도 좀 만들고나서 다시 민주화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도 있었고요.
명함 하나 들고 일본에 갔는데 일거리를 주더라고요. 그래서 은평구에 조그만 공장을 만들어서 수출업을 했죠. 나중에는 건설기계 쪽 일을 했는데 3~4년만에 업계에서 인정받을 만큼 올라섰어요. 김대중정권 때는 여성경제인협회에서 열심히 활동했고 은평에 와서 지역위원장을 맡으면서 밑바닥부터 하나하나 닦아나갔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