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26일 오전 용산 대통령실에서 기자들과 출근길 문답을 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나는 1996년 한국에서 미국 플로리다로 이사를 가서 백인들이 대다수인 중학교를 다녔다. 학교 도서관에서 한국 관련 책을 찾아봤더니, 딱 한 권이 나왔는데, 한국전쟁에 관한 것이었다. 매우 충격이었다. 내가 사는 당시의 서울은 한국 전쟁의 처참함은 찾아볼 수 없는 화려한 도시였기 때문이다. 어느 날은 5살짜리 백인 꼬마 아이와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그 아이가 나를 보고 이렇게 물었다.
"한국에는 TV가 있니?"
너무 당황스러웠다. '1996년에도 한국은 외국인들에게 그저 한국전쟁을 겪은 가난한 나라라는 이미지뿐이구나'라는 생각에 어린 마음에 자존심도 꽤 상했다.
우리 국민들은 그렇게 쓰리고 씁쓸한 나날들을 오롯이 견뎌냈다. 견디며 나아갔고, 나아가서 이루었고, 이루어낸 것들의 결과가 이제는 국내를 넘어 전 세계로 흘러넘친다.
최근 우리 대한민국은 모두가 인정하는 선진국의 대열에 올라섰고, 뉴욕, 파리, 런던 같은 세계적인 도시들에서는 한국 가수들에게 열광하며, 고약한 냄새라고 서양인들에게 멸시받던 김치는 어느새 세계인들이 찾아 먹는 자랑스러운 음식이 되었다.
업무상 해외 출장을 자주 다니는 나는 이렇게 변화된 대한민국의 위상을 피부로 짙게 느낀다. 외국 입국심사대에서 나의 여권을 보며 "You're from Korea"라고 할 때 그들의 미묘하지만 확실한 호감의 뉘앙스가 나를 괜히 더 당당하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지난 일주일간 나는 다시 1996년 플로리다 백인 학교의 한 구석에서 주눅 들고 마음 쓰린 한국 아이가 된 것 같았다. 아니, 그때보다 더 참담하고 부끄럽다.
대통령은 스스로 무너뜨린 격을 쌓으려고 온 국민을 바보로 만들고 있다.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이 정확히 어떤 말이었는지 모른다는 실소를 금할 수 없는 변명은 국민을 우롱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정보와 언어의 공유가 놀랍도록 빠르고 자유로운 이 시대에 해외에서는 이 모습을 어떻게 보고 있을지 생각하면 다음 출장길이 왠지 낯 뜨거워진다.
사과하지 않는 대통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