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오전 종로구 서울정부청사앞에서 진보당, 녹색당, 불꽃페미액션, 전국여성연대 회원들이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을 ‘여성혐오 범죄’가 아니라고 발언한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 사퇴를 촉구하고 있다. 참가자들은 ‘올해 사법처리된 20대 스토킹 피해자 1285명 중 1113명이 여성이다. 스토킹 피해자와 성폭력 피해자의 절대다수가 여성인 한국사회에서, 이번 사건을 여성과 남성의 문제로, 젠더폭력으로 보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엇으로 볼 수 있냐’며 ‘신당역 살인사건은 여성에게 가해지는 성차별과 성폭력이 중첩되고 집약된 명백한 여성혐오 범죄’라고 주장했다.
권우성
불법촬영이나 스토킹 범죄 등은 차별적 성인식에 기반을 두고 발생하는 범죄다. 다수 가해자가 남성, 80% 넘는 피해자가 여성임이 이를 방증한다. 즉 여성을 소유물이나 성적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차별적 인식에서 비롯되는 범죄란 의미다. 그렇다면, 범죄 예방을 위한 최우선 과제로 여성과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적 인식을 개선하겠다고 답하는 게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그런데 김 장관의 발언을 해석하자면, 범죄 예방은 여성가족부의 과제가 아니며 오히려 여성이 피해를 볼 때까지 기다렸다가 '피해자 지원'에만 힘쓰겠다는 것이 아닌가. 신당역 스토킹 살인 현장에서 젠더 기반 폭력 예방에 대해 사실상 여성가족부의 책임 방기를 선언, 논란을 자초한 셈이라고 본다.
여성 폭력 예방은 어디가고... '경제 영역에서의 성차별'만 강조하는 장관
김 장관은 원래 여성가족부 장관으로 정치에 입문한 것이 아니다. 그는 2012년 국민의힘 전신인 새누리당의 비례대표 국회의원으로 정치 행보를 시작했다. 당시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간사로도 활동하며, 과거엔 여러 분야에서 성차별 시정을 위한 법안을 발의했다. 성인지 예산을 강화하는 법안이나 지역구 여성 후보 공천 비율 30% 의무화하는 법안 등이 대표적이다.
한편 김 장관은 아직 교수이던 지난해 4월 <조선일보>에 기고한 칼럼에서, 문재인 정부에서의 30대 기업 성별임금격차가 20년 전과 다름없기에 '페미니스트 정부'가 아니라고 비판한 바 있다. 그는 여기서 문 정부를 "가짜 페미니즘 정권"이라고 비판하며, "진정한 양성평등 실현을 시대의 화두로 삼는 위정자가 필요하다"고 썼다.
통상 성차별적 인식이 노동 시장에 영향을 미칠 때 채용 성차별, 직장 내 성희롱, 성별임금격차나 유리천장 등의 문제가 생긴다. 김 장관 역시 이를 알고 있기에 '양성평등'의 핵심 지표로 성별임금격차를 강조했을 것이다. 또 칼럼에서 문재인 정부가 제 역할을 못했다고 비판한 것을 보면, 김 장관 또한 정부의 역할이 '성별임금격차의 구조적 원인을 해소하는 것'이라는 데 동의한다고 볼 수 있다.
성별임금격차 해소에 대한 의지는 있어 보이지만, 내용은 조금 허술하다. 지난 9월 6일, 여성가족부는 양성평등주간에 2021년 성별임금격차 실태 조사를 발표했다(이는 <여성폭력방지기본법>에 따라 3년에 한 번씩 실시해야 하는 여성폭력실태조사를 별도 발표 없이 홈페이지에 자료만 게시한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하지만 성별임금격차 주요 원인으로는 '여성의 경력단절'만 강조해, 육아하는 여성만 정책 대상으로 삼는 등 현 정부의 지엽적인 인식을 답습하는 것으로 보였다.
여성 대상 폭력의 구조적 원인 직시해야
김 장관의 성평등 인식이 협소하다는 것은 젠더 기반 폭력을 대하는 태도에서 확실히 드러나고 있다. 성별임금격차의 구조적 원인은 인정하면서도, 젠더 기반 폭력의 구조적 원인은 애써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별임금격차는 그 연령대가 높아질수록 더 벌어진다. 성별임금격차가 가장 적은 20대에는 경제적 성차별보다 젠더 기반 폭력으로 인한 고통이 더 크다. 젠더 기반 폭력을 경험하는 연령대도 더 낮아지고 있다. 온라인 그루밍 범죄나 디지털 성착취 범죄로 피해 보는 10대가 늘고 있다. 20대 이하 여성들은 성별임금격차 등 경제적 차별을 경험하기도 전에 젠더 기반 폭력에 노출된 것이 현실이다.
김 장관의 직책은 박근혜 정부의 고용복지수석비서관에서 현 정부의 여성가족부 장관으로 달라졌다. 성별임금격차 해소뿐만 아니라 다양한 연령대의 여성들이 일상에서 경험하는 차별 해소를 위해 폭력과 범죄에도 구조적 원인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 본인의 책무를 다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