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회찬의 데스크탑 컴퓨터에 저장돼 있는 붉은 장미꽃 사진.
노회찬재단
'사랑, 열정, 기쁨, 아름다움'을 꽃말로 하는 붉은 장미는 진보 또는 진보정당의 상징이기도 하다. 정당 정치의 역사가 오랜 서유럽의 진보 정당들은 붉은 장미를 당의 상징으로 삼고 있고, 총선 등에서 당선자에게 장미꽃을 선사하곤 한다.
붉은 장미가 노동자들의 꽃이자 진보의 상징이 된 역사적 기원과 관련해 두 개의 설이 있다. 서유럽설과 미국설이다. 서유럽설은 19세기 서유럽 노동자들의 시위에서 유래한다는 것이다. 당시 노동자들은 정부와 자본의 횡포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일 때면 가슴에 붉은 장미꽃을 달았다. 그들은 촘촘히 붙어있는 장미 꽃잎에서 단결을, 날카로운 가시에서 투쟁을, 붉은 빛깔에서는 노동자의 피라는 비유를 읽어냈다(경향신문, 2008.2.29.).
다른 하나의 설은 19세기 미국에서 그 유래를 찾는다. 1886년 5월 미국 시카고에서는 하루 8시간 노동제를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시위가 연일 벌어지고 있었다. 평화로웠던 집회는 5월 4일 폭력사태로 비화됐다. 해산을 명령한 경찰에게 누군가 폭탄을 던졌고, 이 사건으로 기소된 노동운동 지도자 8명 중 5명이 사형선고를 받았다. 메이데이(5월1일)의 기원이 된 '헤이마켓 사건'이다. 이에 노동자들은 8명에 대한 연대의식을 표시하기 위해 옷깃에 붉은 장미를 달았고, 이것은 세계 근대사에서 장미가 진보를 상징하는 기점이 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붉은 장미의 상징은 관습적으로 차용되는 수준이었다. 붉은 장미의 정치적 지위가 공식화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뒤부터였다. 유럽 각국의 사회주의·사민주의 정당들이 당의 엠블럼으로 붉은 장미를 채택하기 시작했다. 붉은 장미가 사회주의와 사민주의의 상징이 된 것이다. 선발 주자는 1969년 출범한 프랑스 사회당이었다.
한국에서 장미꽃 이벤트의 원조는 민주노동당의 전신인 '국민승리21'이다. 1997년 11월 21일 국민승리21은 권영길 후보의 선거운동을 위해 사용할 심벌 로고를 장미꽃으로 정했다. 이와 함께 상징마크를 '웃음꽃 한반도'로 정하고 이를 장미로고와 함께 사용할 것이라고 밝혔다(한국일보 1997.11.22.) 국민승리21의 언론부장을 지냈던 박용진(현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은 "유럽 사민주의 정당에서 상징을 빌려왔다"며 "한국 정당사에서 장미를 상징물로 채택한 것은 국민승리21이 최초"라고 말했다.
권영길 후보는 유세를 마친 뒤 시민들에게 장미꽃을 나눠주며 지지를 호소했다. 이재영(중앙선본 정책실장)에 따르면 "97년 대선 당시 유권자에게 그냥 다가가기 밋밋해서 유럽 좌파 정당의 사례를 떠올려 나눠주게 된 것"(<진보정치>, 169호, 2004.3.8.~3.14)이라고 한다. 매일 아침 보도자료와 붉은 장미 한송이를 들고 언론사를 방문하는 '아침장미팀'이 당 내에 꾸려지기도 했다.
당시 대통령 선거는 김대중과 이회창, 이인제의 소위 말하는 빅3의 대결 속에서 군소 후보였던 국민승리21의 권영길 후보에 대한 신문의 소개는 한 줄도 소개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아침장미팀이 맡은 일은 매일 아침 각 신문, 방송사의 정치부장 데스크에 권영길 후보의 보도자료와 함께 장미꽃 한 송이씩 가져다주는 것이었다. 이 작업은 어느 정도 효과를 얻었고 전혀 움직일 것 같지 않았던 정치부가 조금씩 권영길 후보에 대한 동향을 취재하기 시작했다.
1999년 1월 국민승리21이 진보정당 창당 제안 원탁회의(1.25.)를 알리면서 장미꽃 언론홍보를 재개해 또 한 번의 눈길을 모았다. 상대방의 얼굴도 제대로 모른 채 팩스로 보내거나 직접 찾아 가더라도 일방적으로 부탁하고 보도자료만 건네주는 무성의한 홍보가 일반적인 관행인 점에 비쳐볼 때 국민승리21의 이같은 홍보전략은 신선한 느낌을 줬던 것이다.
김현일(중앙일보 정치부장)은 "지금까지 개발된 홍보 전략 중에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 꽃을 볼 때마다 생각이 난다. 기사에도 신경을 써줘야 하는데 지면 한정 때문에 오히려 미안한 마음까지 든다"며 국민승리21의 장미꽃 홍보를 칭찬했다. 한 정치부 기자도 "정치부장이 언제 한번 장미꽃을 받아보겠느냐"며 "삭막한 편집국에 장미꽃이 놓여 있으니 다른 기자들도 기분이 좋아진다"고 말했다(윤성한, 국민승리21 시들지 않는 장미 홍보: 대선 이어 진보정당 원탁회의 관련 장미꽃 홍보 재개, 미디어오늘, 1999.2.10.).
'당선 축하', 열 송이 빨간 장미꽃이 활짝 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