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김하늘 에디터
미디어눈
#7 목숨을 건 몽골행
이상하게도 발걸음이 가벼웠다. 그동안 해를 넘겨 20살이 됐고 나의 소년 시절은 가고 청년기가 시작됐다. 끊임없이 펼쳐진 사막 앞에서 막연한 두려움보다 이 순간을 지나서 한국 땅을 밟게 될 생각에 즐겁기까지 했다.
새아버지를 벗어나 처음 탈북을 시도할 때의 마음이 떠올랐다. 브로커는 북두칠성을 향해 사막을 건너가다가 몽골 국경수비대가 보이면 무조건 잡히라는 말을 해주었다. 그 말이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브로커는 한국이 몽골과 교류를 맺어 몽골에 자원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몽골은 발견된 탈북자를 한국으로 이송해준다고 했다.
칠흑같이 어둡고 깜깜한 사막의 밤하늘을 뚫고 크고 작은 별들이 밝게 반짝였다. 북두칠성을 따라서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길을 걷고 또 걸었다. 몸은 힘들지만, 자유로움을 느꼈다. 막연한 불안함도 함께 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잡념의 흐름을 끊는 소리가 어디선가 들렸다. 개 짖는 소리였다. 개가 있다면 분명 근처에 사람이 있다는 얘기다. 소리를 질렀다.
우리 일행은 개가 짖는 방향을 향해 달렸다. 철조망 너머 몽골군이 보였다. 지친 몸으로 있는 힘껏 한국으로 보내달라고 소리쳤다. 대화가 통할리 없었지만, 몽골군도 무언가를 열심히 말하는 듯했다. 그러다 일행 중 한 명이 가방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냈다. 조그만 태극기였다. 환한 달빛 아래 하얀 태극기가 선명하게 보였다. 몽골군이 알 수 없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우리를 안내했다.
악취가 나는 수용소에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모두 탈북자들이었다. 패잔병처럼 쓰러져 있던 어떤 사람의 다리에선 동상 때문인지 진물이 질질 흐르고 있었다. 또 다른 누구는 온몸에 붕대를 둥둥 감고 있었다. 한국에 가면 가장 먼저 다리를 절단해야 한다는 소리도 들렸다.
"아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알고 보니 대부분 일주일에서 길게는 한 달을 사막에서 헤매다가 온 사람들이었다. 어떤 일행은 동행한 13명 중 3명만 살아남았다고 했다.
"목이 말라서 소변을 먹으며 버티다가 쓰러졌는데, 운 좋게도 순찰대가 발견했어요."
옛날 독일, 소련 영화에서나 보던 일이었다. 우리 일행은 중국에서 출발하고부터 24시간이 채 안 돼 군인들을 만났으니 정말 운이 좋은 것이었다.
비행기가 보였다.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였다. 탑승 직전까지 온몸이 떨렸다. '한국 땅을 밟아 자유를 찾는가, 아니면 이대로 잡혀서 돌아가 죽느냐.' 불안감이 감돌았다.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가 흔들리면서 날기 시작했다. 엄마와 우리 일행은 그제야 말문이 트였다. 한국에 가까워진 비행기에서 승무원의 안내방송이 들렸다. 한국말이었다. 내가 다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었다.
"승객 여러분. 우리 비행기는 곧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합니다. 자리에서 일어나지 마시고 내리실 때는 잊으신 물건이 없는지 확인하시고…. "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무언가 뜨거운 것이 머리까지 쭉 올라왔다.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8. 한국, 내 꿈이 뭐냐고?
북한을 벗어나겠다는 일념 하나로 목숨을 걸고 두만강을 넘고 사막을 건넜다. 살기 위해서였다. 북한에서는 출신 성분에 따라서 내 삶은 정해져 있다. 외할아버지가 전주 출신인 나는 적대계층이었다. (* 종교를 갖고 있거나, 남한이나 중국 등지에 가족 내력이 있어서 감시의 대상이 되는 계층)
열여덟 살이 되면 군대에 가고 28~29살쯤에는 중매를 통해 결혼했을 것이다. 그러고 나면 대부분 국가에서 배치해주는 농장이나 직장으로 배치받는다. 부모님이 농부였으니 나는 농사일을 하고 있었을 거다. 그렇게 정해진 삶을 살다가 죽는다. 여기서 누군가 내 꿈이 뭐냐고 물었다면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꿈같은 소리 하네."
그런데 인천공항에 도착해서 한국 땅에 발을 내디디며 꿈이란 걸 꾸게 되었다. 탈북해 있는 동안 제대로 못 했던 공부를 하고 싶었다. 남들 다 가는 그 학교란 곳에 꼭 가보고 싶었다. 그리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었다.
하나원 적응훈련을 마치고 사회로 나가게 되면 바로 대학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북한 기준으로 중학교 2학년 중퇴, 한국 기준으로 초등학교 6학년 중퇴였던 나는 학력을 인정받기 위해 검정고시를 먼저 준비했다. 그리고 긴 노력 끝에 한 대학에 중국어 전공으로 입학할 수 있었다.
#9. 학생증
학생증을 받은 날, 너무 기뻐서 잠이 안 왔다. 중국에 사는 4년 동안, 매일 아침 일어나면 누운 자리를 확인했었다. 어제 잤던 곳이 맞는지, 혹시 간밤에 잡혀서 어디 다른 곳에 온 건 아닌지. 이제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다. 내게 학생증이 생겼으니까. 열심히 학교에 다녔다.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고 한국에 왔는데 죽기 살기로 하면 안 될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갑자기 시작된 학교생활이 쉽지만은 않았다.
탈북자들에게는 '정착 나이'라는 게 있다. 탈북을 한 해부터 한 살이 되는 건데, 대학에 입학했을 때 내 정착 나이 6살이었다. 지금껏 살아온 곳과 완전히 다른 새로운 체제에서 6살짜리가 스물몇 살짜리 애들과 상대하는 것 같았다. 한국 친구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외래어로 이야기하는 것도 골치 아팠고, 교육 수준도 높았다. 그들과의 경쟁에서 자꾸 한계를 느꼈다.
학교 친구들은 중국어는 물론이고 영어까지 잘하고 시험에도 익숙했다. 전공 공부는 재미가 없었지만, 남들보다 한 발 더 뛰면 된다는 마음으로 억지로 3년을 버텼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약한 생각이 들었다. 한국 사회는 '학연, 혈연, 지연'이라던데, 내가 가진 것이 하나라도 있을까? 점점 자신감을 잃어갔다.
어느 날 같은 친한 동생이 학교에 안 나왔다. 빨리 취직해서 독립하고 싶다며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하는 친구였다.
"형, 나 취직이 안 돼서 휴학했어."
그 친구가 휴학한 이유를 듣고서 한방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이런 똑똑한 아이들이 취직을 못 한다니... 취직을 못하면 몸으로라도 때워야 할 텐데. 이렇게 똑똑하고 열심히 생활하는 친구들도 취직이 어렵다면, 나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혈우병이란 불치병까지 있는 몸으로 내가 할 수 있는 뭐가 있을까? 절망이 나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10. 방황, 그리고 연극
6개월간 피시방을 전전하며 방황이 시작됐다. 죽어버리면 어떨까 싶다가도 중국에서 네 번이나 북송당해서 살아 돌아오신 어머니가 자꾸 눈에 밟혔다. 군인들에게 잡혀 울며 살려달라고 외치던 기억도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럴 즈음 남북청년 교류 활성화를 위해 활동하는 시민단체의 대표를 만나게 되었다. 그분은 내게 생각지도 못한 활동을 제안했다.
"우리 모임에 탈북자를 연기할 사람이 없는데, 혹시 연극 한 번 해볼래요?"
연극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내게 너무나도 어이없는 제안이었다.
'그래, 이미 밑바닥 인생인 마당에 못할게 뭐 있어.'
덥석 시작한 연기였는데 생각보다 재밌었다. 처음 하게 된 작품의 주인공은 나와 많이 닮아있었다. 목숨을 걸고 한국에 왔지만, 탈북자들에 대한 편견으로 인해 겪는 어려움과 내적인 갈등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