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지난 8월 시어머니의 밴쿠버 방문이 결정됐다. (사진은 MBC 드라마 <백년의 유산>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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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지난 8월 시어머니의 밴쿠버 방문이 결정됐다. '외국에 살 때 한 번쯤 여행은 시켜드리는 게 도리'라는 마음에 시어머니를 초대했지만, 막상 시어머니의 방문 날짜가 다가오자 부담스러운 마음이 밀려왔다.
한국에서 식사를 할 때면 함께 자리한 집안 남자들(시아버지, 남편, 아들)이 식사를 마치기가 무섭게 물을 떠다 주곤 하셨던 시어머니. 남편이 자신의 빨래를 스스로 개며, 식사준비를 하고 설거지를 하는 모습을 어머니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두려웠다.
동시에 내면에선 두 마음이 싸우기 시작했다. '어머님 앞에선 착한 며느리가 되자, 잠깐 계시는 거니 그냥 맞춰드리자'라는 마음과 '우리의 변화가 잘못된 것도 아닌데, 당당히 보여드리고 대화를 나눠봐'라는 상반된 마음이 충돌했다.
나는 고민 끝에 평소처럼 자연스럽게 행동하기로 결정했다. 시어머니가 오실 때마다 '착한 며느리'인 척 행동한다면, 칭찬은 받을지 몰라도 내 마음은 점점 더 시댁과 멀어질 것 같았다. 나는 '착한 며느리' 대신 '솔직한 며느리'가 되기로 다짐하고 독박돌봄노동 탈출 후 처음으로 시어머니와 마주했다.
[에피소드1] 이 나간 그릇
시어머니는 점심 무렵 밴쿠버에 도착하셨다. 남편이 시어머니를 마중하러 공항에 간 사이 나는 아들과 함께 청소를 하고, 식사를 준비했다. 시어머니와 반갑게 인사를 나눈 후 식탁에 둘러앉았다. 나는 평소보다 조금 더 조심스럽고 얌전하게 국과 밥을 담았다.
하지만, 집주인이 제공한 이가 나간 그릇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 문제였다. 1년 반만 잠시 살다갈 터라 그릇을 바꾸지 않고 그냥 써왔다. 시어머니는 이가 나간 그릇에 음식을 담는 나를 보더니 한 말씀 건네셨다.
"아비랑 아이 것은 여기에 담지 마라."
순간, 올 것이 오고야 말았구나 싶었다. 좋은 것은 남자들의 몫이고, 흠이 있는 것들은 여자들이 사용해야 한다는, 자신을 낮추는 시어머니의 마음. 내게 그런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 아님을 알았지만 갑자기 숨이 턱 막혀왔다. 잠시 숨을 내쉰 후 최대한 웃으면서 "그럼 우리도 여기다 먹지 말아요"라고 말하며 음식을 새로 담아냈다. 그렇게 첫 위기는 지나갔다.
[에피소드2] 집안일 손도 안 대는 사위... 딸이 안됐어
다음 날. 남편은 출근을 하고 시어머니와 나는 오랜만에 둘이서 차 한 잔을 하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시어머니의 화제는 시누네였다. 요지는 시누가 아이들 방학 때 시어머니댁에 오래도록 머물다 갔는데, 그 이유가 시누의 남편이 집안일을 거들지도, 아이를 봐주지도 않아서 힘들기 때문이라는 거였다. 시어머니는 평생 가족을 위해 희생해온 자신의 모습을 딸이 닮아가는 것 같아 내심 속상해하시는 눈치였다.
"엄마처럼 안 살 거라고 생각했는데 점점 나를 닮아간다는 말이 마음에 걸리더라. 그래서 내가 일 시작하라고 했어. 일하면서 하고 싶은 것도 하고, 집안일은 가사도우미 도움받으라고 말이야."
시어머니의 이 말씀에 난 용기를 내어 그동안 우리 집에서 일어난 변화들에 대해서 말씀드렸다. 왜 가족 구성원들이 아내(엄마)의 희생에 의존하지 않고 함께 가정을 보살펴야 하는지, 왜 가정이 각자의 독립과 성장을 위한 곳이 돼야 하는지, 이를 위해 우리가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 차근차근 이야기했다.
남편이 집안일을 얼마나 잘하는지, 이런 모습을 배워가는 아들이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등을 전하며 함께 가정을 가꾸니 부부 사이도 더 좋아진 것 같다고 시어머니께 털어놓았다. 시어머니는 "그렇게 대화로 풀어가고 노력하는 거 보니 좋다, 아범이 집안일도 잘하고 그런다니 좋네"라고 답하셨다. 난 시어머니와 여자로서 공감대가 형성된 것 같아 무척 뿌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