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김하늘 에디터
미디어눈
중국에서 라오스까지는 열흘이 넘게 걸렸다. 일주일은 침대 버스로, 사흘은 기차를 타고 라오스로 향했다. 긴 시간만큼 참기 힘들었던 것은 냄새다. 화장실 냄새, 발 냄새, 담배 냄새, 향신료 냄새, 사람에게서 날 수 있는 냄새란 냄새가 다 섞인 곳에서 24시간을 보내니 매일 구역질이 나왔다. 그나마 중국어를 잘하는 누나들이 사 오는 간식 먹는 재미로 버텼다.
라오스에 도착하자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다.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니고, 태국으로 가기 전에 신원 조사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감옥은 아니었지만, 잠은 경찰서 안에서 자야 했다. 일주일 뒤 라오스와 태국 사이 국경을 넘었다. 태국으로 가기 전에 브로커는 국경을 넘자마자 민가가 보이면 초인종을 누르라고 언질을 줬다. 일단 경찰한테 잡혀야 한국 대사관에 갈 수 있는 길이 생기기 때문이란다.
수풀을 헤치고 나가니 얼마 안 가 눈앞에 집이 보였다. 브로커가 시킨 대로 초인종을 누르고 사람이 나오자 "폴리스 폴리스!"를 외쳤다. 집주인은 너무 익숙하다는 듯이 경찰을 불러줬다. 잠시 후 수송차와 경찰이 왔다. 우리 무리가 40명 정도였는데, 트럭으로 3~4번 왔다 갔다 한 끝에 일행 모두가 교도소에 수감될 수 있었다. 불법으로 국경을 넘었기 때문에 교도소에 있어야 한다고 했다.
머리가 빡빡 밀렸고, 팔다리에 쇠고랑을 찼다. 생각보다 수감 기간이 길었다. 한 달을 넘게 감옥에서 지낸 것 같다. 사람들은 왕년의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무료함을 달랬다. "내가 중국에서 경찰한테 주먹 한 방을 날렸는데 3m는 날아갔다니까!" 가끔 허세를 부리는 것이 뻔히 보이는 코웃음 나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무료한 감옥생활의 재미이기도 했다.
때가 되자 방콕 한국 대사관으로 옮겨졌다. "안녕하세요!"로 시작하는 한국말이 들려왔다. 그제야 여기가 한국 대사관이라는 것을 실감하고 살았구나 싶었다. 하지만 한 가지 관문이 더 있다. 간첩인지 아닌지, 북한 사람인지 아닌지 심사를 거친다. 탈북민 정착금을 노리고 북한 사람인 척하는 조선족들이 꽤 있다고 한다. 심지어 조선족 방언은 함경도 방언과 비슷하다. 그래도 노련한 전문가 심사관을 속일 수는 없는 모양이다.
마지막 관문, 대사관에 울린 아줌마의 울음소리
심사관들은 북한 내 고향 지도도 그려보게 하고, 유도 신문을 하면서 예리하게 북한 출신인지를 판별했다. 그때 어디선가 아줌마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북한 사람이 아니라고 판정된 것 같다. 들어보니 북한에서 태어나서 세 살 때 중국으로 가서 고향에 대한 기억이 없고, 북한 출생이라는 것을 보증해줄 사람도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심사관은 냉정히 한국으로 갈 수 없다고 통보했고, 아줌마의 울음소리는 대사관 전체에 울려 퍼졌다. 그 이후로는 어떻게 됐는지 나도 모르겠다.
북한을 떠나 긴 두 달을 보내고 드디어 고대하던 한국 땅을 밟았다. 한국은 어떤 곳일까?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한국에 와서도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도착하자마자 몇 달의 조사 기간이 이어졌다. 그곳에서의 생활은 매우 규칙적이었다. 시간표에 맞춰 움직이고, 식사하고, 혼자 있을 수도 없었다. 북한에서 이런 생활이 너무 익숙해져 있어서 불편하다는 생각은 안 들었다.
가끔은 영화를 보여주기도 했다. 영화 보는 날은 여자들과도 만날 수 있어서 더 기다려졌다. 조사가 끝난 뒤에는 하나원으로 옮겨졌다. 하나원에서의 생활은 훨씬 자유로웠다. 축구도 할 수 있고, 밥도 맛있고, 노래방도 있고, 운동실에 탁구대도 있었다. 가끔 서울 투어도 했다. 창밖의 한국은 너무 아름다웠다. 빨리 저곳을 몸소 느껴보고 싶었다.
하나원 생활이 끝나서야 진짜 한국 생활이 시작됐다. 들뜬 마음만큼이나 처음 몇 년을 매우 신나게 보냈다. 정말 신나게. 당장 뭘 할지도 몰랐고 신기한 것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놀려면 돈이 필요했다. 친구한테 들으니 자격증을 따면 600만 원을 받는 프로그램이 있다고 했다. 당장 인천 송내역 앞 OO 전문학교에 등록해서 자격증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학원이 끝나면 다시 피시방과 클럽으로 가서 자유를 만끽했다. 아무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영화 속에서만 보던 그 자유였다. 그리고 자격증도 땄다. 뭔가를 이루고 보니 뿌듯했다.
"야, 우리 공장에 빨갱이가 세 놈이나 있다더라"
2년을 그렇게 놀면서 보냈는데 20살이 되니 공부가 하고 싶어졌다. 여명학교라는 탈북자를 위한 학교가 있다고 해서 찾아갔다. 그런데 서류를 붙고 면접을 봤는데, 떨어졌다. 선생님은 내가 공부할 생각이 없는 애라고 했다. 놀던 티가 너무 많이 났나보다. 다음 날 학교에서 전화가 왔다. 예비 반에서 1년을 공부하면 정식 입학을 할 수 있게 해준다고 다시 와보라고 했다. 알겠다고 하고 들어갔는데 이건 영 아니었다. 그 반 학생들은 곱하기와 나누기도 할 줄 몰랐고, 심지어 어떤 친구는 한글도 쓸 줄 몰랐다. 나는 심사 기관에서 고졸 학력을 인정받은 상태였다. 반을 올려달라고 했지만, 자리가 없다고 거절당했다. 이건 아니다 싶어서 바로 때려치웠다.
공부하려는데도 마음대로 안 되는구나 싶어서 돈이라도 벌자고 결심했다. 누가 거제도에 가면 일당이 10만 원이라기에 바로 거제도로 갔다. 어떻게 해서 조선소에 일자리를 얻어서 취직한 줄 알았는데, 총무하고 면접을 봐야 하니 이력서를 준비하라고 했다. 이력서는 한 번도 써본 적이 없었고 어떻게 쓰는 줄도 몰랐다. 이력서를 몇 시간 동안 쳐다봤지만 한자도 적지 못했다. 아무리 봐도 어떻게 써야 할지를 모르겠고 보고 있으면 화가 났다. 결국 양식을 갈가리 찢어버렸다. 다행히 총무에게 솔직히 말하니 이해한다며 일을 시켜줬다.
전기 검사하는 일이었다. 무전기와 도면을 들고다니면서 체크하는 일이다. 다행히 생각보다는 힘들지 않았다. 일이 끝나면 또 거제도의 피시방과 클럽으로 달려갔다. 돈 버는 재미는 있었지만 일을 계속하고 싶진 않았다. 2년이 채 안 됐을 때 그만두겠다는 이야기를 꺼냈더니 대표님이 "이 새끼 미친 소리 하고 있네. 회사가 마 애들 장난이가! 니 나가고 싶으면 나가고 들어오고 싶으면 들어오고"라며 엄청나게 혼쭐냈다. 욕 제대로 먹고 첫 직장을 그만뒀다.
대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구미 핸드폰 공장에서도 일했었다. 그곳에는 나 말고 다른 탈북한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눈에 큰 상처가 있었는데 어느 날 다른 동료가 그 친구를 보며 한마디 던졌다.
"와 빨갱이 무섭게 생겼네!"
친구가 "뭐라고요?"라고 되묻자 그 직원은 "야 장난이다, 임마!" 하고 넘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치고받는 싸움으로 번졌고, 결국 사장님까지 알게 되는 소란이 벌어졌다. 그 광경을 보고 온 친한 형이 내게 말을 걸었다.
"야, 우리 공장에 빨갱이가 세 놈이나 있다더라."
"... 형, 그 빨갱이 나 말하는 거예요? 쟤, 내 고향 친구예요. 나도 북한에서 왔고요."
형은 얼굴이 빨개져서 몰랐다며 미안하다고 했다. 그렇구나, 북한에서는 나보고 반동분자라더니 여기서는 빨갱이구나.
얼마 뒤 핸드폰 공장을 그만뒀다. 빨갱이 소리 때문만은 아니다. 돈 버는 것도 좋고 노는 것도 좋은데, 내 인생의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뭐지?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까.
답은 너무 간단했다. 노는 것이다. 나는 진짜 노는 것 하면 누구에게도 안 질 자신이 있다. 그런데 놀면서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지? 그때 떠오른 게 영화다. 북한에서 이불 덮고 몰래 숨죽여 한국 방송을 보며 여기에 오는 꿈을 키웠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한번 만들어보면 어떨까? 대충 시나리오 쓰고 촬영하면 될 것 같은데 대학 가서 한번 배워보자. 그렇게 영화과로 진학을 결정했다.
그래,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