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장야산 언덕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농장
오창균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 중에서 농부로서의 삶은 한 번도 고려해본 적이 없었다. 어쩌면 죽어도 하기 싫은 일이 농사였을 것이다. 농촌에서 태어났고 새벽부터 해 질 녘까지 남의 땅에서 소작농을 하던 부모님을 보며 자랐다. 힘들고 가난한 삶의 원인이 농사라고 생각했다.
고향을 떠나 공장노동자를 거쳐 컴퓨터프로그램 전산기술직에 취업했을 때는 신분이 상승된 것도 같았다. 결혼 후 보통사람의 평범한 삶을 살아가다가 1997년 IMF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문득 새로운 꿈이 생겼다. 남은 삶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지내고 싶다는 소박한 바람이었다.
생산은 없고 소비만 하는 도시를 떠나 산골에서 자급자족으로 농사짓고 글 쓰며 소박한 삶을 일궈보고 싶었다. 그 당시 유행처럼 몰아치던 귀농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아내는 완강히 반대했다. 10년 후에는 보내준다는 약속을 받았다. 그날이 올 때까지 컴퓨터 튜닝 자영업을 하면서 텃밭농사라도 짓자는 생각으로 도시농업시민단체 활동을 시작했다. 그렇게 텃밭을 일구는 도시농부가 되었다.
10년의 세월은 금세 지나갔다. 전업농부가 되기 위한 귀농을 본격적으로 계획했다. 2014년, 때마침 알게 된 사람으로부터 경기도 시흥 그린벨트지역의 1만 평 농장에서 함께 농사를 짓자는 제안을 받았다. 귀농 지역과 농지를 따로 알아볼 필요가 없을 뿐더러, 아내의 희망 사항인 서울 집과도 가까웠다. 드디어 꿈꿨던 농사를 해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농사로 먹고살 수 있는가첫술에 배부르랴는 속담처럼, 농사 시작 첫해는 수입이 적은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농장을 정비하고 농사를 계획하는 준비과정으로 여겼다. 농장의 규모로 보면 최소한 세 명의 숙련된 노동력이 필요했다. 반면 공동생산과 공동분배에 동의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한때 세 명이서 농사를 짓기도 했지만, 만족할 만한 수입이 보장 안 되는 현실을 깨닫고 떠났다. 결국 둘만 남게 됐다.
농사의 작부체계(작물을 심는 일)와 관리는 주로 내가 담당했다. 동료는 지역의 다양한 인력네트워크를 활용해 직거래 판매와 농사체험, 주말농장 등을 기획했다. 자연과 멀어진 사람들이 농사를 통해 치유하고 휴식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자는 게 농장의 운영 취지이기도 했다. 덕분에 많은 사람이 농장을 찾았다.
운영 목적에 맞게 안전하고 건강한 농산물을 생산하려 노력했다. 화학농약과 비료를 쓰지 않는 친환경재배를 원칙으로 정했다. 잡초 억제를 위한 검은 비닐을 덮지 않아 풀숲을 만들기도 했다. 농사면적에 따른 노동력의 한계를 무시한 채 원칙만을 고수하다가 관리를 못 해 낭패를 본 것이다.
지금은 작물의 생육환경에 맞춰서 낙엽으로 덮거나, 비닐을 쓰더라도 풀을 적절하게 키우는 등 자연상태에 가까운 환경을 유지하며 농사를 짓는다. 어떻게든 처음 농사를 시작할 때의 목적만은 지키고 싶었다. 오래전부터 유기농과 자연농에 관심이 있었고, 농산물에 돈 이상의 가치를 담고 싶었다. 그런 이유로 유통시장에 내놓지 않고 생산자와 소비자가 서로 신뢰를 하는 직거래 판매를 고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