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분계선 넘는 남-북 정상2018 남북정상회담이 열린 27일 오전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손을 잡고 군사분계선(MDL)을 넘어오고 있다.
한국공동사진기자단
2018년 4월 27일은 1945년 한반도가 두 동강이 난 뒤 처음으로 남과 북의 동포들이 가슴이 터질 듯한 감동을 겪은 역사적인 날로 기록될 것이다. 그날 오전 9시 29분, 대한민국 문재인 대통령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판문점의 군사분계선에서 뜨겁게 손을 맞잡는 장면은 그야말로 극적이었다. 남쪽에서 두 정상의 만남과 회담을 생중계한 TV 앞에서는 환호성과 손뼉 소리가 요란했고, 어떤 사람들은 눈물을 쏟기도 했다. 초등학교 교실에서 TV를 보던 어린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남동공동성명과 6.15선언, 10.4선언
8·15 해방보다 11개월 앞선 1944년 9월 충남의 한 면 소재지에서 태어난 나는 민족과 겨레가 분단된 이후,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에 입학하기 한 해 전인 1950년 6월에 한국전쟁이라는 참극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들었다.
다른 모든 이웃과 마찬가지로 우리 집안도 풍비박산이 나버렸다. 아버지와 삼촌들은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었고, 나는 어린 여동생을 업은 어머니와 함께 외딴 마을의 친척집으로 피란을 했다. 한 달쯤 뒤에 돌아와 보니, 타버린 집에서 아직도 연기가 모락모락 나고 있었다. 어머니와 우리 남매는 마을의 인척 집 방 한 칸을 빌려 하루에 시커먼 보리밥 두 끼쯤으로 주린 배를 채우면서 노오란 하늘을 올려다보곤 했다.
우리 마을에서 가장 큰 집 마당에 주둔하고 있던 인민군들은 저녁마다 어린이들을 불러 모아 '적기가'를 가르쳤다. "원수와의 혈전에서 붉은 기를 버린 놈이 어떤 놈이냐? 돈과 지위에 꼬임을 받은 더럽고도 비겁한 그놈들이다 / 높이 들어라 붉은 깃발을, 그 밑에서 굳게 맹세해."
1950년 9월 하순 인민군이 철수한 뒤 저녁에 우리 마을 한가운데 넓은 마당에서 그 노래를 부르던 어린이들은 어른들에게 지독한 꾸중을 듣거나 매를 맞기까지 했다. 초등학교에 들어간 뒤에는 6월 25일만 되면 시가행진을 하면서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 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로 시작되는 '6·25의 노래'를 목청 높여 불렀다.
현대 세계사상 유일하게 73년 동안이나 분단을 극복하지 못한 한반도에서 민족공동체 구성원들이 겪은 고난과 비극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한국전쟁으로 남과 북에서 엄청난 인명 살상이 벌어졌고, 양쪽 권력의 이데올로기 대립으로 무고한 희생자들이 속출했다. 남에서도 북에서도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소리 높여 불렀지만 그것은 그저 노랫말일 뿐이었다. 남북의 평화공존과 통일을 지향하는 움직임이 몇 번 있기는 했다. 1972년 7월 4일, 남한의 박정희 대통령과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극비리에 추진한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된 것이 첫 번째 사례다.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이라는 3원칙을 표방한 그 선언이 나오자 남쪽에서는 곧 통일이 될 수도 있겠다는 희망이 부풀어 올랐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바로 그해 10월 17일, '조국통일'과 '민족중흥'이라는 미명 아래 장기집권을 위한 헌정 쿠데타를 저질렀다. 김 주석도 12월 27일, 남북공동선언을 빌미로 조선민주주의공화국 헌법을 사회주의헌법으로 개정함으로써 독재체제를 더욱 굳혀 나갔다.
그 뒤 남과 북에서 집권세력이 평화공존과 통일을 지향하는 운동을 펼친 것은 단 두 차례뿐이었다.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함께 서명한 '6·15 남북공동선언'이 첫 번째다. "통일문제의 자주적 해결, 양측 통일방안의 공통성 인정, 이산가족 문제의 조속한 해결, 경제협력을 비롯한 교류 활성화, 합의사항을 조속히 실천에 옮기기 위한 실무회담 개최 및 김정일 위원장의 서울 방문"이라는 5개항을 명시한 그 선언은 남북 교류를 활발하게 만들고 화해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김대중 정권이 극도로 약해진 채 물러남으로써 큰 결실을 보지 못했다.
2007년 10월 4일,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이 평양에서 합의한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10·4 남북공동선언)은 6·15선언보다 훨씬 구체적으로, 다양하게 남과 북의 상호 존중과 다방면 협력을 명문화한 것이었지만, 지지기반이 지극히 취약해진 노 대통령이 퇴임을 4개월 남짓 남기고 이룬 것이어서 실효를 거두기 어려웠다.
트럼프 대통령이 돌변할 가능성은 아주 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