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순씨는 세월호 수색중단 기자회견을 마치고 쓰러진 아내를 추스리고 담배 한개피로 연신 연기를 뿜어 냈다. 그리고 참아내던 눈물 한방울을 엄지 손가락으로 몰래 훔쳤다.
이희훈
사는 게 참 바빴다. 영인이가 초등학교 다닐 때, 아빠 정순씨는 손을 다쳤다. 가죽 회사에서 일하던 중 기계에 손이 빨려 들어갔다. 2년간 병원 신세, 장애 4급 판정.
엄마 선화씨도 늘 일을 했다. 염색하는 원단 공장이었다. 실을 염색할 수 있도록 감아주는 일을 했다. 주간조일 때는 아침 8시부터 저녁 7시까지 실을 감았다. 야간일 때는 저녁 7시부터 다음날 아침 8시까지 일했다. 그 사이 영인이가 컸다. 제대로 신경 쓴 것도 없는 거 같은데, 운동을 좋아하는 사내아이로, 알아서 착하고 순하게 컸다. 큰 목소리 낼 일도 만들지 않는 아들이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야 옷에 좀 신경을 쓰는 거 같았다. 뛰어놀기만 하던 아이가 어느새 이만큼 자랐구나 싶었다. 키가 10cm 넘게 컸다. 내성적이던 아이가 친구들도 사귀고, 거울 앞에 자주 가기 시작했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옷을 주문하기도 했다. 딱 그렇게 멋을 부리려고 하던 찰나였다. 아직 채 시작도 되지 않은 젊음이었다.
밖을 다닐 수가 없었다. 누굴 만날 수도 없었다. 혹시나 누가 알아볼까 봐, 부모는 죄인이었다. 내가 자식을 못 지켜서 사고가 났나, 엄마는 늘 자신을 탓했다. 지키지 못했으면 찾기라도 해야 하는데, 그마저도 못하고 있으니. 내가 잘못한 게 그렇게 많았던가. 부모는 늘 죄인이었다.
결국 영인이 없는 영인이 장례식을 치르기로 했지만, 하루에도 마음이 여러 번 바뀐다고 했다. 10년 20년이라도 찾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찾을 수 있을까 수백 번 수천 번을 생각하는데, 방법이 안 떠오른다고 호소했다. 정순씨는 "이제는 내 손을 떠난 문제 같아요"라며 "내가 결단을 하고 안하고의 문제도 아니고, 하고 싶다고 계속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닌 거 같아요"라고 말했다. 선화씨가 가슴을 치며 말했다.
"배에서 뼈 한 조각이라도 나왔으면 하는 마음으로 기다렸는데, 무리인 거 같아요. 유실되지 않았을까… 언제 어떻게 어디로 떠내려갔는지 알 수가 없죠. 영인이가 세월호에 탄 거 그거 하나 말고는 분명한 게 하나도 없어요."엄마와 아빠는 배에서 나온 아들의 가방과 교복, 지갑을 챙겼다. 사주고 싶었던 축구화와 평소 잘 입던 옷도 상자에 넣었다. 이제 아들을 하늘나라에 보낼 준비를 마쳤다.
버틴 세월과 버텨야 할 세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