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황씨한 번 생각해보자. 고려대 영문학사-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 경영학 석사(MBA) 엘리트 코스를 거친 뒤, "잘나가는 삼성맨"이었다가 미국 대기업의 수석부사장까지 될 정도로 도구적 합리성을 충실히 체득한 사람. 그런 사람이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두 주먹을 불끈쥐고 '하늘 타령'을 하는 장면을. 이 결합이 수상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페이스북 갈무리
<동아일보>는 이 '미국 취업 멘토링 워크숍'(청년드림 캠프 주최) 멘토가 "뱅크오브아메리카 메릴린치 자산관리 부문 수석부사장"이라고 했습니다. 그 자리에 앉으려면 얼마나 도구적 합리성을 체득해야 할까요.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멘토는 또 "월스트리트 진출을 꿈꾸는 한국 유학생들 사이에선 '성공 신화의 주인공'이자 대표적 롤모델"이라고 합니다.
신화(神話)는 신들의 이야기입니다. CEO와 신(神)이라니. 경제적 기호와 종교적 기호가 '부지불식 간에' 교차하는 이 지점. 저는 여기서 멘토 담론의 실체, 즉 '정신적 균열'을 발견합니다. "합리성을 강요하는 모든 조직은 비합리성에 기생한다"는 웹툰 <송곳>의 명제는, 조직을 사회 단위로 확장해봐도 참입니다. 종교의 정신은 이성보다는 감성에 가깝기 때문입니다(경외, 죽음에 대한 두려움 등).
그랬던 겁니다. 결국 합리를 표방하는, 자유시장경제도 감성에 호소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감성은 사람을 노동의욕과 동기로 채워주는 에너지니까요. <동아일보>는 '헬조선 담론' 중 하나인 '흙수저론'을 콕 집어 반박하는 만큼, 대안도 하늘이 감동할 수준의 '열정'으로 취사선택합니다. 하지만 하늘은 우리가 노력하든 말든 감동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것은 과연 누구의 감동인지가 수상합니다.
얼마나 노오오오력해야 감동할지도 미지수인 게 요즘 현실이므로, 확률적으로도 무모하죠(아르스프락시아 연구원 김학준씨는 이 오자를 헛되다는 의미에서, '오'(誤)라고도 풀이합니다). 그런데 왜 '어른들'은 이렇게까지 구차하게, 청년들을 기복 신앙적 감성으로 획일화시키려 할까요. 그 자리를 이제 좀 연대·사랑·사회적 정의감이 대신하면 안 될까요.
[썰(說) 둘] 부디 헬조선을 '노잼' 만들지 마세요
언어가 도구라면, '헬조선' 담론은 2015년 청년들이 생산한 도구입니다. 어른들의 '노력→성취'라는 속 편한 해결책이 청년들을 배반하면서, 어른들이 애써 감춰왔던 계급과 구조적 모순이 폭로됐습니다. 물론 진보 진영의 기대를 배반한 지점도 있습니다. 가령 '죽창'은 꼭 구조적 모순에 대한 분노뿐 아니라, 운동권에 대한 희화화의 맥락에서도 쓰입니다.
헬조선의 "진정한 멘탈리티"(관련 기사:
김학준 "아, 숨막혀" <월간 틀> 12월호)란 존재하지 않고, 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헬조선을 외치는 '청년'은 동질한 집단이 아니며, 동질해야 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죠. 저는 헬조선 담론으로 기존 청년세대론에 좀 '균열'을 내고 싶은 '청년'이었습니다. '달관 세대', 'N포 세대' 등. 어른의 관점을 투과한 '무기력한 청년' 상이 얼마나 많습니까. 표현만 그때그때 바꿔 등장했을 뿐입니다.
정말 청년들이 죄다 무기력한 게 아니라, 어른들이 자꾸 이미지를 취사선택하고 재생산함으로써 더 그렇게 만드는 건 아닐까요. 저는 저처럼 분노하는 청년도 있다고 '생존신고'를 하고 싶었고, 비슷한 처지인 청년들의 생사도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확인했습니다. 트위터에서 '급성' 울화병 증세를 보이는 청년들, 이들은 부조리에 분노하지만 일상 정치에는 '답답한 장애물'에 발목 잡혀 진출하지 못 했습니다(관련 기사:
'헬조선' 최후의 탈출구, 죽창은 분풀이에 불과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