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절요>. 서울시 동대문구 청량리동의 세종대왕기념관에서 찍은 사진.
김종성
박근혜 정권이 추진하는 역사 새로 쓰기는 한국사의 발전 방향을 거스르는 것이다. 박 대통령은 그 누구보다도 아버지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10·26 이후에 아버지의 부하들이 아버지 시대의 유신 정치와 선을 긋는 것을 보면서 세상과 정치에 대한 회의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래서 그에게는 아버지의 명예회복이 세상 그 어떤 일보다도 시급할 수밖에 없다.
그런 박 대통령이 주도적으로 만들 국정 교과서에 담길 역사관은 1961~1979년 시기에나 어울릴 만한 게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1980년 광주항쟁과 1987년 6월항쟁을 통해 대한민국 국민들이 이룩한 민주적 성과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이다. 이를 계기로 대한민국 국민들은 자신들의 역사관·세계관에 전혀 어울리지 않은 역사교과서를 통해 역사를 배우게 될 것이다.
역사책이 이 정도로 바뀌려면 중대한 정치적 변화가 선행되는 게 이치에 맞다. 건곤일척의 정치투쟁에서 누군가는 승리하고 누군가는 패해 세상이 바뀔 정도의 변화가 이뤄진 뒤에야 역사책을 새롭게 쓸 수 있는 것이다.
역사교과서가 바뀐 뒤에 역사가 바뀌는 게 아니다. 역사가 바뀐 뒤에 역사교과서가 바뀐다. 이성계·정도전도 역사교과서를 바꾼 뒤에 역사를 바꾸지 않았다. 역사를 바꾼 뒤에 그 여세를 몰아 역사책을 바꾼 것이다. 그래서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그런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박 대통령과 새누리당이 집권세력이기는 하지만, 한국 사회는 그들이 희망하는 것과 다른 방향으로 지속적으로 흘러가고 있다. 민주주의는 갈수록 진전되고 있고 복지사회를 향한 움직임도 점점 더 진척되고 있다. 박 대통령과 새누리당도 이런 흐름을 거역하지 못하고 어느 정도는 여기에 편승하고 있다.
한국 사회가 진보의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는 점은, 대한민국의 국가 의사를 결정하는 국회의원들의 구성에서도 잘 드러난다. 새누리당의 선배 정당들에 맞서 싸운 광주항쟁과 6월항쟁의 주역이나 이들의 정신을 계승하는 사람들이 대한민국 국회 의석의 상당 부분을 점유하고 있다. 이런 상태는 1979년 이전의 정치상황과 너무나도 판이하다.
그런데도 박 대통령은 대통령의 명령 하나만으로 대한민국의 역사관·세계관을 1979년 이전으로 획일화시키려 하고 있다. 국회 내의 정적들은 물론이요, 사회 곳곳에 만연한 진보의 표상들을 상대로 명확한 정치적 승리도 거두지 못한 상태에서 역사교과서부터 바꾸려는 것이다.
박 대통령의 모습은 새로운 나라도 세우지 못한 상태에서 새로운 나라의 역사교과서부터 쓰려는 시도에 비견될 수 있다. 이것은 이성계·정도전이 고려도 멸망시키지 않은 상태에서 고려 역사를 자기들 마음대로 새로 쓰려고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다. 이성계·정도전은 그런 일을 시도하지 않았다. 가능성도 없는 일이지만, 지혜로운 일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그런 시도를 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시도는 성공보다는 실패로 끝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물론 박 대통령은 자신의 대통령 당선을 위대한 정치적 승리로 간주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자신에게 역사교과서를 새로 쓸 힘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거둔 승리는 기나긴 역사 속에서 보면 작은 일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런 승리는 전두환도 거뒀고 노태우도 거뒀다. <삼국사기>를 읽다 보면 생소한 이름의 왕들을 자주 접할 수 있다. 한 개인이 왕이 되는 것은 그 개인에게는 위대한 승리일지 모르지만, 국가 전체나 역사 차원에서 보면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박 대통령의 대통령 당선도 먼 훗날에는 그렇게 기억될지도 모른다.
이처럼, 박 대통령은 역사서 개조에 필요한 기본 조건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는 대한민국의 민주와 진보의 흐름을 이끄는 거대한 힘을 상대로 아무런 승리도 거두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역사책을 새로 쓰려 하고 있으니, 박 대통령의 도전은 대단한 오만이라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박 대통령이 역사책을 전면적으로 바꾸고 싶다면, 청와대에 앉아서 대한민국을 합법적으로 통치할 게 아니라 광화문광장으로 나가 대한민국을 상대로 불법적인 투쟁에 나서야 한다. 거기서 승리를 거둬 사실상 새로운 나라를 세운 뒤에야 역사책을 새로 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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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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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도 안 했던 일, 박 대통령은 왜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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