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 필승' 정종섭 행자부 장관 "진심으로 송구"새누리당 연찬회에서 '총선 필승' 건배사로 논란이 된 정종섭 행정자치부 장관이 28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브리핑실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자신의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이날 정종섭 장관은 "어떤 정치적 의도나 특별한 의미가 없는 단순한 덕담이었다"며 "진심으로 송구스럽게 생각하며 앞으로 이런 일이 없도록 깊이 유념하겠다"고 사과했다.
유성호
'사인'이란 무서운 거다. 박근혜 대통령의 실핏줄까지 언론의 도마 위에 오르는 시대, 청와대와 여당, 부처 장관들의 제스처나 말 한마디가 중요하게 읽힐 수밖에 없는 시점이다. 대통령의 임기가 절반을 넘겼고, 남북이 대화 모드에 돌입했으며,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있다. '정치의 계절'이 가시화되고 있다.
그런 와중에 정종섭 행정자치부 장관의 "총선 필승" 발언이 터져 나왔다. 지난 25일 새누리당 의원 연찬회에서다. 선거 중립의 의무를 지켜야 할 한 나라의 장관이 "총선 필승"이란 건배사를 외친다는 것이 상식적인지 묻고 싶다.
그 정종섭 장관이 28일 오전 11시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브리핑실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사과했다. 짧은 회견이었다. 그나마 박근혜 대통령과 다른 점이 있다면, 두 명의 기자에겐 질문을 받았다는 정도랄까.
그가 한 회견을 요약해 보면 이렇다. "연찬 건배사에서 총선 필승 발언은 송구"하고, "정치적 의도나 특별한 의미 없는 단순한 덕담"이었으며, "총선 공천에 대한 생각 없는 관계로 행정자치부의 선거 중립 의무를 엄중히 지킬 것"이며 "장관으로서 맡은 바 소임 다하겠다"고 했다.
짧고 간결하게 자기 할 말만 하고선 꿋꿋하게 퇴장한 정종섭 장관. 그는 이 기자회견을 본 국민이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 줄 것이라고 생각한 걸까.
진심 안 보이는 사과, 차라리 "장관 소임" 내려 놓으시라 제스처는 결국 신념이거나 무의식의 발로다. "건배사에 익숙하지 않아"서 벌어진 해프닝이라고 하기엔 너무 크다. 시기상 누가 보면 매우 당연했고, 또 누가 보면 매우 부적절했을 것이다. 새정치민주연합이 탄핵 소추안 카드를 꺼낸 것은 어쩌면 야당으로서 당연한 처사다.
그런데도 정 장관은 일파만파 퍼진 자신의 이 정치적 사인과 제스처를 단 몇 분의 기자회견으로 마무리 지으려 하고 있다. 표정만 놓고 보면, '겨우 이 정도로 내가 왜 이런 자리에서 견해 표명을 해야 하나' 싶을 만큼 기분 나쁜 얼굴을 한 채로. 송구가 아닌 유감, 유감이 아닌 불쾌 혹은 '의미 없음' 수준이었다고 할까.
발언과 상황만 놓고 보면, 정종섭 장관은 "공무원 기타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는 자(기관·단체를 포함한다)는 선거에 대한 부당한 영향력의 행사 기타 선거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하여서는 아니된다"는 공직선거법 9조 1항을 위반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농후하다.
정치판의 한가운데서 한 발언을 두고 '정치적인 의도'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국민을 얼마나 우습게 봤기에 명백한 정치적인 행위도 이렇게 어물쩍 넘어가려 하나. 법리적인 문제는 새정치민주연합이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정 장관을 고발한 만큼, 위반 여부 판결을 기다리면 될 일이다. 만일 위법으로 판단이 난다면 법에는 능통한 정 장관이 헌법재판소에 헌법 소원을 제기하면 된다. 잘 알다시피, 문제는 이 사안이 정 장관 개인의 처사나 거취로 끝날 일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기자회견 직후, <TV조선>에 출연한 한 정치평론가는 정 장관이 "평소 정치권에서 총선 출마 권유를 많이 받은 인물"이라고 소개했다. 그러나 이것은 본인의 문제일 뿐이다. 국민이 관심사는 이미 "행정자치부의 선거 중립 의무"를 지키지 못했다는 점에 꽂힌다.
이미 장관이 진영 깊숙이 들어가 "승리"를 외치는 총선은 관권선거보다 더 심각한 불공정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국정원은 들먹일 것도 없다. 우리는 이미 여당을 위해 각종 관과 군이 총동원돼 시간과 인력이 투입됐던 지난 대선의 불공정 사례를 똑똑히 기억한다. 한 번 한 도둑질, 두 번은 더 쉽다. "장관으로서 맡은 바 소임", 차라리 일찌감치 내려놓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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